정보(情報)

한국 대통령 순서

서문섭 2022. 8. 17. 13:55



역대 대통령


1~3대 이승만 (李承晩) 재임 1948.07 ~ 1960.04 전 정무공무원, 독립운동가


4대 윤보선 (尹潽善) 재임 1960.08 ~ 1962.03 전 정무공무원, 전 국회의원
5~9대 박정희 (朴正熙) 재임 1963.12 ~ 1979.10 전 정무공무원, 전 군인


10대 최규하 (崔圭夏) 재임 1979.12 ~ 1980.08 전 정무공무원


11,12대 전두환 (全斗煥) 재임 1980.09 ~ 1988.02 전 정무공무원, 전 군인


13대 노태우 (盧泰愚) 재임 1988.02 ~ 1993.02 전 정무공무원, 전 군인


14대 김영삼 (金泳三) 재임 1993.02 ~ 1998.02 전 정무공무원, 전 국회의원


15대 김대중 (金大中) 재임 1998.02 ~ 2003.02 전 정무공무원, 전 정치인


16대 노무현 (盧武鉉) 재임 2003.02 ~ 2008.02 전 정무공무원, 전 변호사


17대 이명박 (李明博) 재임 2008.02 ~ 2013.02 전 정치인


18대 박근혜 (朴槿惠) 재임 2013.02 ~ 전 정치인










이승만(1875.3.26 ~ 1965.7.19) 황해도 평산
- 초대, 2, 3대 대통령(1948 ~ 1960)
- 자유당 창당 총재, 시장경제 체제 도입
- 장기집권 개헌, 정적 탄압
- 한국전쟁에서 자유 민주체제 수호
- 한미 동맹 구축
- 배재학당,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




윤보선(1897.8.26 ~ 1990.7.18) 충남 아산
- 4대 대통령(1960 ~ 1962)
- 4.19 민주혁명 이후 상황 관리
- 에든버러대학교, 경희대학교, 인터내셔널대학교
- 2대 서울특별시 시장




박정희(1917.11.14 ~ 1979.10.26) 경북 구미
- 5, 6, 7, 8, 9대 대통령(1963 ~ 1979)
- 배우자 육영수, 아들 박지만, 딸 박근혜, 박서영
- 제2군 부사령관
- 5.16 군사정변 주도
- 2대 민주공화당 총재
- 산업화 및 한강의 기적
- 민주화 억압, 유신 독재
- 새마을 운동
- 자주국방 기초 구축
-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




최규하(1919.7.16 ~ 2006.11.22) 강원도 원주
- 10대 대통령(1979 ~ 1980)
- 10.26 이후 상황 관리
- 14대 외무부 장관
- 도쿄고등사범학교, 다퉁학원, 한국외대, 강원대




전두환(1931.1.18 ~ ) 경남 합천
- 11, 12대 대통령(1980 ~ 1988)
- 육군대장
-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 신군부 독재
- 물가, 경제 안정
- 서울 올림픽 준비
- 대구공고, 육군사관학교, 육군고급부관학교, 미국육군보병학교, 페퍼다인대학




노태우(1932.12.4 ~ ) 대구
- 13대 대통령(1988 ~ 1993)
- 41대 내무부 장관, 1대 민주자유당 총재
- 민주화 전환기의 정치 혼란, 사회 불안
- 북방 외교
-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
- 육군사관학교, 조지워싱턴대학, 모스크바대학




김영삼(1927.12.20 ~ ) 경남 거제
- 14대 대통령(1993 ~ 1998)
- 1대 신한국당 총재
- 정치군인 청산
-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 도입
- 경제운용 실패로 외환위기 초래
- 서울대, 와세다대, 뉴욕대, 소르본느대, 원광대




김대중(1924.1.6 ~ 2009.8.18) 전남 신안
- 15대 대통령(1998 ~ 2003)
- 목포일보 사장, 흥국해운 사장, 신민당 총재, 1대 새천년민주당 총재
- 수평적 정권 교체
- 불법 대북 송금, 한미동맹 냉각
-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노벨상 수상, 국제 평화상, 외환위기 극복
- 에모리대학, 모스크바대학, 카톨릭대, 원광대, 포틀랜드주립대, 경희대, 고려대, 조지타운대, 워시본대, 캠브리지대, 영남대, 남개대, 공주대






노무현(1946.8.6~2009.5.23) 경남 김해
- 16대 대통령(2003 ~ 2008)
- 민주당 최고위원, 해양수산부 장관
- 부산상고, 모스크바대, 알제대, 원광대




이명박(1941.12.19 ~ ) 경북 포항
- 17대 대통령
- 현대건설, 인천제철 등 현대그룹 10개사 대표이사 사장 회장 겸임
- 32대 서울특별시 시장
- 고려대, 한국체대, 조지워싱턴대, 서강대, 국립유라시아대, 몽골대, 목포대,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파리 제7대학교, 아디스아바바대




박근혜(1952.2.2 ~ ) 대구 중구 삼덕동
- 18대 대통령, 최초 여성대통령
- 아버지 박정희, 어머니 육영수, 동생 박서영, 박지만
- 육영재단 이사장,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회 의장(2003),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2012)
- 서강대학교 전자공학 학사, 카이스트 이학 명예박사, 부경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서강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 출처 : 네이버, 위키백과




역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의 업적과 과오는 무엇일까?




이승만:초대~제3대 대통령


<업적>
평화선을 만들어 대한민국의 해양 주권을 선언
초등교육의무제를 도입
농지개혁을 실시해 전통적 지주.소작제를 붕괴시켜 근대 자본주의 토지 소유 구조 발전시킴
<과오>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에 대한 소극적 태도
독재정치의 그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그리고 사사오입개헌
3.15부정선거




윤보선:제4대 대통령


<업적>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안 마련
관료제 개편과 지방자치장선거를 통한 지방 자치 시대 구축
<과오>
과거청산과 사회계혁에 소극적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다 시민사회의 반발




박정희:제5~9대대통령


<업적>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시로 한국 경제 발전의 토대
베트남전쟁 참전과 브라운 각서로 외화획득과 한국군 장비 현대화
포항제철의 준공으로 중공업 생산품의 증대
경부고속국도 건설로 수출물량의 이동을 획기적으로 개선
<과오>
저자세적 한일 기본 조약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사건
비상계엄을 통한 유신헌법제정, 초헌법적 긴급조치권




전두환:제11대~12대 대통령


<업적>
과외금지, 졸업정원제로 입학의 문호 확장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성공적 유치 노력
한국의 프로스포츠(야구, 축구) 출범으로 스포츠발전 토대
<과오>
5.18 광주때 유혈진압
삼청교육대의 인권유린
유신헌법의 독소조항을 따른 새로운 헌법제정
언론사의 통폐합, 출판사의 등록취소
수많은 비자금 의혹




노태우:제13대 대통령


<업적>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언론기본법 폐지로 언론의 자유 신장
범죄와의 전쟁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활동
<과오>
보안사민간인사찰의혹
광주사태발언
정치비자금 뇌물수수 혐의






김영삼:제14대 대통령


<업적>
비리척결,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지방 자치 단체장선거로 지방 자치 시대 확립
역사바로세우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과오>
국가부도위기로 인한 IMF의 지원
신한일어협협정
지나친 대북지원, 친인척비리




김대중:제15대 대통령


<업적>
기업구조조정과 금융개혁을 통해 경제적난국 타개
햇볕정책으로 남북간 교류 활성화, 노벨평화상
사회복지제도 확충, 남녀차별 금지법 제정
<과오>
위헌적 소지가 있는 남북공동선언
지나친 대북지원, 친북적 성향
지역감정의 심화
측근들의 비리




노무현:제16대 대통령


<업적>
남북교류 활성화, 과거사 정리
권위주의 청산, 국민 참여적 정부
<과오>
부동산, 대학등록금 폭등
청년실업, 비정규직 급등
과외, 사교육비 폭등
지역균형발전 정책 논란, 한미FTA논란
대북 안보관 논란, 친인척비리




이명박:제17대 대통령


<업적>
한국의 외교적 성장. 아덴만 선원구출
중동 원전수주
<과오>
친인척비리, 언론탄압논란
종북세력 척결 소극적, 민간인사찰의혹






*최규하대통령은 제외








초대 이승만대통령.(1대~3대)
미국에 의해 독립이 �는데 그 거대한나라 미국의 후원으로 대통령이 된분이였고 머리는 희고 얼굴은 귀족풍의 노신사로 조선왕조시대의 왕같은 풍모를 지닌분으로 생각됩니다.그는또 자질구레한일은 장관에게 맡기고 본인은 큰틀의 결단을 내리는 말하자면 큰정치를 하는분이였습니다.그래서 "반공포로석방"이라던지 좀억지가 있지만 대한해협에 평화선을 그어서 일본선박이 못오게 한사건또 대마도를 반환 하라는성명 이라던지 세인을 깜짝놀라게 하는 사건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그만큼 큰정치를. 큰것만보고하는 스타일이였습니다.그는 혼란기의 초대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이 확실히 자유진영에 몸담도록 줄서기에는 성공했고 다만 말년의 욕심으로 독재자의 오명을 쓰고 물러난것 입니다.

윤보선 대통령.(4대)
윤보선 대통령은 4.19혁명으로 세운 2공화국에서 내각책임제하의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실권을 잡은 장면총리와 의 불화로 군사쿠테타가 일어나자 오히려 두둔하는듯한 발언을하여 후에 정치인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로 보인 분입니다. 5.16후 더이상 군부에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사퇴하고 맙니다.

박정희대통령.(5대~9대)
이분처럼 명암이 엇갈리는 분도 없습니다. 쿠테타. 유신독재. 긴급조치의 과(過)와 오천년역사 이래의 보릿고개 타파.세계에 유래없는 경제발전.세계10대 공업국진입. 등의 공(功)으로 아직도 의견이 나뉘는 분입니다. 그러나 가난한나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나라의 가난을 물리치려고 노력하고 열정을 쏟고 국민을 단결하게 하고 그힘으로 온국민에게 하면된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분입니다.가난을 없애고 우리나라를 경제대국으로 안착시킨분 이면서 유신독재로 다른면을 보이고 혁명가 답게 측근에 의해 총격으로 서거 하였습니다.

최규하대통령(10대)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서거후 당시 국무총리로 대통령 권한대행과 10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허수아비 대통령이 돼어 사임합니다.

전두환 대통령.(11대~12대)
'79년 10.26으로 박정희가 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되자 국군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사건 합동수사 본부장을 역임합니다.박정희 살해 현장에 있던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조사하려다가 12.12사태가 일어나고 전두환은 일약 실력자로 전면에 나서고 최규하대통령의 하야로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그는 재임중 기업인으로 부터 수천억의 돈을 받아 아직도 환수중에 있습니다.
전형적인 독재정권의 단면을 전두환은 보여주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13대)
노태우는 전두환의 육사동기로 12.12사태의 주역의 한사람으로 전두환 집권후 항상2인자로 군림하며 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노태우는 전두환보다 소심하고 어떠한 정책다운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합니다.이것은 한국은 영원히 핵폭탄을 갖지않겠다는 약속을 세계를 향해 선언 해버린것입니다. 북한은 그런말을 한적도 없는데 스스로 핵무장이라는 마지막카드를 아무런댓가없이 포기한것 입니다.그를 가리켜 흔히 물태우 물통이라 부르는 이유가 정책다운 정책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김영삼 대통령.(14대)
김영삼은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자신의 민주당을 3당 합당하고 민자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어 노태우의 후임으로 92년 대통령에 당선 됐습니다.취임초기에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점차적으로 실책이 거듭되면서 지지도가 내려않더니 급기야 1987년11월 IMF를 겪게만듭니다.그의재임중엔 삼풍백화점붕괴 대구지하철공사장 사고 여객선전복사고 비행기 추락사고등 사고가 계속발생해 사고공화국이라는 별명도 그때나온것 입니다.그러나 김영삼은 모든 사고를 전임자들의 잘못으로 말하여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또 그의차남 김현철이 부정사건으로 대통령아들로는 처음으로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그는 큰사건이 터지면 국면전한용으로 다른사건을 만드는데 그대표적인사건이 전두환 노태우 구속사건 입니다.구속직전까지 성공한 쿠테타는 역사에 맡기자면서 그들의 정당에 들어가 대통령이된 사람답게 그들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보였으나 지지도가 떨어지자 국면전환용으로 그들을 쿠테타사건으로 구속시킵니다.물론 그들은 부정부패 사건에도 연루되어 구속되야 마땅하나 김영삼은 국면전한용으로 이용한것으로 보입니다.그러나 김영삼은 IMF이후 일년간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없는것처럼 지내다가 퇴임하게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15대)
김영삼의 국정실패로 다시금 회생한것이 바로 김대중대통령 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IMF를 일으켜 국가 경제는 바닥이나 마치 바람앞에 등불이 되었을 때 김대중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빠르게 IMF에서 국가를 회복시킨 IMF에 휘몰아친 나라에서는 볼수 없는 유래라고 말할 정도로 경제 대통령이었습니다. 김영삼의 실패를 김대중이 살린 것입니다.
1997년12월 대통령에 당선되고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역시 많은 지지를 받았읍니다.그의 치적으로는 유명한 햇볕정책으로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 냈습니다.또한 50여 년 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 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IMF처리과정에서 국민의 혈세가 공적자금으로 부실기업에 유입되어 많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크레디트카드를 남발하여 카드부실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국 어디서나 인터넷을 무료로 배울 수 있도록 하여 세계에서 한국만큼 인터넷 속도가 빠르게 열리고 발전한 나라는 없을 정도입니다.


노무현대통령.(16대)
누구도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것 입니다.
그만큼 인지도도 없는 돌출인물이 노무현 입니다.여하튼 우여곡절끝에 2002년12월 대통령에 당선 �습니다.그도 취임초기엔 신선한 서민이미지로 환영받았으나 취임첫 행사가 신문사 고발이였고 그의 발언에 선거법에 저촉되는 부분이 많아 선거관리위원회로 부터 주의도 받았으나 사과하라는 야권의 공세에 특유의 오기로 버텨 국회로 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국민들의 약자편들기에 편승해 다시 기사회생 한것입니다.노무현 대통령은 언어구사에 문제가 있고 오기와 고집이 대단한걸로 비쳐 집니다. 잦은 말바꾸기 일관되지 않은 정책발표.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수도이전문제.정권퇴진문제로 인한 국민위협발언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고 미국 중국 일본에 대한 국내서 발언한것과 외국에나가 발언하는것에도 일관성이 없습니다.미국에가서는 미국에 아첨하듯이 발언하고중국에가서는 모택동을 존경한다는 국립묘지에 있는 중공군과 싸우다 전사한 수많은 호국영령을 모욕하는듯한 어리둥절하게 하는발언등등 아무튼 아직 진행형의 대통령이니 지켜봐야 겠지요.

 
 
     
     
 
상식
 민셉이 ・ 2020. 10. 2. 8:56


1, 그리스도 이름~삼위일체 예수
2, 석가모니 이름~고오타마 시달타


3, 옛적 말에 온돌방이 추우면 큰 굿을 한다고 했다
이유는 굿을 하게 되면 자연적 불을 많이 넣기 때문에
방이 뜨시기 마련이라 뜨시지 않겠는가
그래서 웃지 못 할 우수개소리가 있다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의 유래
 민셉이 ・ 2020. 3. 8. 11:20
빌려온 글

□ 연혁
- 757년 보성군
- 1441년 흥양현
- 1895년 포두면
- 1963년 오취리 편입
- 1990년 송산출장소 개소
- 1998년 송산출장소 폐지
□ 지역특성
- 고흥반도 동남부에 위치하여 군내 읍면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음
- 경지면적은 3347ha로 군전체의 16% 해창만 간척답등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어
양질미 생산지
- 시설원예 재배단지화 및 잘발달된 해안 간사지를 활용한 바지락, 굴수하식
양식이 활발 주민소득 높은편임


남성리 - 익금, 남성】
익 금 (益金)
마을앞에 모래가 많이 쌓이는 해안이 있어 長沙里라고 부르다가 어촌지명으로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하여 뒷산 지형이 六拘尾(여섯마리개의 꼬리가 모인 形局)이라는 뜻에서 六拘尾리라 하였으며 그후 개모양에 의한 지명으로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다하여 발음이 비슷한 益金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포두면의 가장 남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남 성 (南星)
남성마을은 옥강리를 연결하는 城터(지금의 馬牧城)가 있고 이城을 옛날에는 南浦城이라 부르다가 南星으로 바꾸어 불렀는데 조선말에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쪽 하늘의 老人星이 비춰주어 장수(長壽)하는이가 많다는 뜻에서 南星이라 부르고 있으며 南星里의 中央마을로서 포두면내에 가장 큰 마을이다.
【옥강리 - 우산, 내초, 외초, 봉암, 정암】
우 산 (牛山)
원래 옥강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옛날마을 부근에 소를기른 목장이 있었고 마을앞이 바다이므로 "牛牧浦"라 부르다가 1936년 일제시대에 마을을 한자화할 때 마을 뒷산이 臥牛形이라해서 牛山으로 바꾸어 1986년 법정마을로 독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 초 (內草)
외초마을과 경계지역의 산모양이 새머리와 같다고하여 "새두"라 하였고 옛지도에는 두마을이 草梁이라 表記되어 있는데 草梁의 안쪽마을이라는 뜻에서 "안새두"라고 불렀는데 1936년 마을명을 한자화할 때 內草라고 개칭한 이래 법정마을로 독립되어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 초 (外草)
처음에는밖에 있는 마을이라해서 "바깥새두"라 하였는데 그후 草梁의밖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1936년 일제시대에 마을명을 한자화할 때 外草라고 불렀으며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 암 (蜂岩)
원래 옥강리의 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東南쪽에 "까막재"가 있다고하여 烏峙라고 불러왔으며 마을 뒷산중턱에 벌바위가 있다고하여 蜂岩이라 부르다가 1980.1.1부터 자연마을로 승격 독립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 암 (亭岩)
옥강리 외초에 속해 있던 마을로 지금부터 70년전 일제시대에 진흙을 빚어 기와와 옹기를 구운곳이라하여 "와등"이라 부르다가 해창만 간척지 개답후 외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마을뒷편 바위가 많아 1987년도에 자연마을로 승격시 亭岩마을로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차동리 - 신촌, 내산, 외산】
신 촌 (新村)
원래 차동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設村당시에 당산골 주민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새터에서 영원 무궁한 마을로 번창된다는 뜻으로 新村이라고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87년도에 자연마을로 승격됐다.
내 산 (內山)
원래 차동리지역에 속하며 마복산(馬伏山)골짜기에 두 개의 마을이 있어 산내(산안에 있는 마을이라고 부르며 두마을의 안쪽에 있다고하여 "안산내"라 불리어 오다가 1936년 일제시대에 마을명을 한자화 할 때 안산내를 內山으로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 산 (外山)
원래 차동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마복산 골짜기 아래 두마을중 남쪽바깥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큰산내"라고 불리어왔으며 1936년 일제시대에 마을명을 한자화 할 때 마복산 좌측 주변의 기암괴석과 산수가 어울리는 남쪽밖에 위치한다하여 外山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동리 - 원세동, 장촌, 양지 미후】
원세동 (元細洞)
확실한 설촌연대는 알수 없으나 원래 金, 林, 崔씨의 三性이 숲몰, 참샘몰 양쪽에 각각 정착하여 村名이 "龍洞"으로 불리다가 70~80여년전부터 가느다란 골짜기에 있다는 뜻으로 "가는골"이라 하였으며 같은뜻으로 細洞이라 부르다가 細洞里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元細洞이라 改稱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 촌 (長村)
자세한 設村과정은 알수 없으며 1910년 한일합방전까지 마을을 藏財라 하다가 일제시대 長村으로 불렀으며 옛날에 長者가 살았다고하여 오래 富村繁榮한다는 뜻에서 해방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시 長村마을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 지 (楊地)
망덕산 양지바른 기슭에 형성된 이마을은 건너편 米朽마을을 풍수지리상 음지(陰地)라 하고 이마을을 陽地라하다가 1954년 회관이 전소된후 마을지명이 불길하다하여 1956년 리동행정구역정리시 陽을 楊으로 바꾸어 버들양자로 써서 마을명을 楊地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미 후 (米朽)
원래 세동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명을 처음에는 佳山이라 부르다가 한일합병 이후 농경지가 확대되어 마침내 곡창을이루자 창고에서 쌀이 썩을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다 하여 불리우던 마을이름 "사시기" "쌀새기"를 한자화하여 米朽로 개칭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길두리 - 봉덕, 덕촌, 안동, 전동, 후동, 신흥동】
봉 덕 (鳳德)
마을앞 섬이름을 본따 "대섬"이라 부르다가 1700년경 지리적으로 마을앞 대섬에는 대나무가 무성했고 그앞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는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았다는 새를 비유하여 "봉황새"만이 살곳이라하여 "鳳"字를 썼고 새가 하늘높은 곳에서 세상에 德이 빛남을 본후에야 인간이 나타난다하여 "德"子를 썼다고하며 또 마을뒤에 비봉산이 솟아 있고 마을앞 해창만의 덕을 입는다는 뜻에서 비봉산의 鳳과 德이 합하여 마을 명을 鳳德으로 改稱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 촌 (德村)
원래 길두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조선시대 말엽에는 큰골이라 불리어 왔으며 해방후 정일권 전국무총리가 마을명을 自活村이라 명명하였는데 1979년 고흥군 부군수 김철환이 德을 크게쌓을 마을이될 것이라하여 마을명을 덕촌이라 개칭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 동 (雁洞)
원래 안골(內洞)이라 칭해와으나 약 300여년전 입향조인 丁世胄의 子인夏協의 호를 雁洞이라고 한데서 연유 되었다고하여 마을의 地形이 기러기가 알을 품은 것 같다는 뜻에서 또는 老瓮垂釣形局 즉 늙은이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으니 해가 거듭할수록 고기바구니가 가득할 것이니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릴것이라고 해서 마을 명을
금사 (金砂)
원래 봉림지역에 해당된 마을인데 천등산 자락에 위치하고 금탑사(金塔寺) 아래있는 마을로서 옛날 이산에 금빛나는 암석(또는 탑)이 있고 마을에 모래가 많아 金砂里라고 불렀으며, 금탑사 아래 입구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동구라고 불렀으나 일제초기에 金寺里 또는 金砂里라고 표기하였고 해방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되면서 마을명을 金砂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수리 - 원장수, 연등】
원장수 (元長水)
원장수리 중앙에 해당되며 마을의 地形이 고흥읍 호형리에 뻗어내린 山이 노루머리와 같다고하여 獐首라 부르다가 마을앞 長水川의 이름을 따서 長水로 개칭한 이래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으뜸마을이라하여 元長水로 하였고 1985년도에 장수저수지가 시설되면서 연등리지역으로 옮겨 새터를 잡아 현재의 마을이 形成됐다.
연 등 (蓮嶝)
원래 장수리지역에 해당되며 마을 뒷산이 경사가 급하여 소가굴러 떨어졌다하여 "두락"이라 부르다가 마을앞에 鍾沈淵이 있고 마을의 산등성이에 위치한다하여 蓮嶝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포리 - 평촌, 중흥, 자연동】
평 촌 (平村)
원래 상포리지역에 해당된 마을로서 해창만 바닷가의 입구(머리)에 위치하므로 "갯머리"라 하였으며 벌판에 있는 마을이므로 平村이라고 개칭하였으며 마을앞 삼거리 도로는 국도 15호선과 지방도 855호선과 연결된다.
중 흥 (中興)
원래 상포리지역에 해당된 마을로서 약500여년전 마을뒷쪽 두원면 운암산 중터에 中興寺라는 큰절이 있어 절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中興이라 이름하여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동 (紫烟洞)
옛날 이마을에 紫烟濟라는 큰 서당이 유명하여 紫烟洞이라 불리어왔으며 본래 이곳은 조선조때 고흥지방의 광물의 일종인 自然銅이 채광된 곳으로 추측되며 自然洞이 紫烟으로 바귀었다고 한다.
【남촌리 - 원남촌, 당산】
원남촌 (元南村)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폐합시 남촌리 일부를 상포리에 이관하고 남촌리로 독립행정리가 되었으며 南村이라는 지명은 남쪽을 바라보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마을의 중심을 "각정"이라 하였고 위치가 남쪽을 바라보는 마을의 중앙지이므로 마을이름을 元南村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 산 (堂山)
원래 해창만 포구(浦口)에 있는 마을이므로 "海倉"이라 하였으며 부락 뒷산에 堂이 있어 堂山으로 바뀌었는데 해창은 興陽縣 남부일대에서 나라에 바치는 양곡과 해산물 및 특산물을 보관운송하던 곳으로서 대서면의 松林倉과 함께 흥양현 15리 바닷가에 있는 흥양현 2개창고중의 하나인 松串海倉이 있었던 역사적인 해운수송의 요충지였음.
【송산리 - 동촌, 신월동, 서촌, 동산동, 만화】
동 촌 (東村)
옛날 이곳 인근에 "각정"이라는 곳에서 동쪽에 위치하므로 東村이라 불러왔다고 하며 점암면 천학리과 접하고 있는데 1986년 법정마을로 독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바다였으나 해창만 간척지 개답후 타지에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이곳에 정착한 후 1988년도에 新月洞으로 명명 자연마을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 촌 (西村)
옛날이곳 인근에 "각정"이라는 곳에서 西쪽에 있어 西村이라고 불렀으며 포두면의 북쪽 끝에 운암산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임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산동 (銅山洞)
골짜기의 지형이 마치龍이 숨어있는 形局이라하여 "龍隱谷"이라 하였는데 약 150년전부터 이곳에서 고흥지방토산물의 일종인 自然銅이 채광되었다고하여 銅山洞이라 불러왔으며 1959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만화 (晩花)
약 300여년전 이마을 샛터에 晩花亭이라는 유명한 정자가 있어 마을이름을 晩花亭이라 불러왔으며 1956년에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된 후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점암면과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오취리 - 상오, 신오, 오취, 달성】
상오 (上梧)
옛부터 北쪽에 있는 吉頭里 飛鳳山에서 鳳의 새끼 자웅이 있어 飛梧桐이면 不棲하고 非竹筍이면 不食한다하여 鳳德앞에 竹島가 있어 梧桐이 잘 자라는 梧桐島에 鳳凰 자웅이 나라와서 숫鳳은 上梧에 암鳳은 翠島에서 둥지를 틀었다하여 蓬萊面 梧桐島라 칭하다가 梧翠里로 개칭했다, 그후 1956년에 上梧라는 자연마을로 독립 되었다가 1963.1.1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浦頭面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신오 (新梧)
원래는 상오마을에 속했으나 본동과 떨어져 있는 관계로 이행정 등에 불편함이 있다는 주민의 뜻에따라 1995.12.29 분동되어 마을명을 신오라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오취 (梧翠)
옛날 이섬에 鳳이 좋아하는 오동나무가 많고 鳳이 살았다는 전설에 의하여 이섬을 오도라 하였으나 1914년 일제초기 행정구역폐합시 마을명을 梧翠라 개칭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달성 (達城)
1925년에 형성된 마을로서 設村당시에는 "넉섬"또는 達島라고 부르다가 1986년7월1일자로 정식 법정마을로 승격되어 뜻을 모아 성공할 마을이라는 뜻으로 達城이라고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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