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와 참새 60

봄비 오는 날

비 오는 날 그 자리에 막 구겨진 종이처럼 네가 서 있다 네 섰던 그 자리 콜록거리며 지나가는 바람 한 소절 바람이 훑고 간 텅 빈 자리 아직 겨울나무로 떨고 서 있는 너의 그림자 비에 씻기는 얼굴이 차갑게 느껴지는 밤 비라는 이름을 가진 낱낱의 몸짓들은 무너지는 천 개의 얼굴이던가 목 울대가 뻐근하도록 서럽다 괜찮아 그렇게 사는 거야 살다 보니 그러네 낯익은 너의 목소리 심장은 해일처럼 길길이 날뛰고 오늘 밤, 비는 내 품속에서 울었다 너를 만나고 싶어서 비는 내리고 그 자리엔 흐트러진 얼굴 하나 사무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제비와 참새 2024.02.19

흐르는 눈물

바다와 땅이 울고 있습니다 울지 않으려 해도 눈물이 흐릅니다 눈물은 꽃송이 되어 떨어집니다 방글방글 웃으며 하얗게 피듯 엄마아빠하고 달려오던 꽃송이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흐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보석 영롱한 진주 같은 것이 방울방울 떨어집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가슴 환히 비추던 아침햇살 눈물줄기 따라 무지개다리를 타고 하늘로 오르고 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되어 손 흔들며 높이 오르고 있습니다 4/16

제비와 참새 2022.08.17

홀아비 꽃대를 흔드는 바람

백 등꽃 사월의 담장 밖으로 주르륵 꽃 타래 흘러내리고 은방울 소리 낭랑히 들리는 그 남자의 꽃 대궐을 열면 오죽 댓 닢 푸르름 아래 사랑하던 식솔들 다 떠나보내고 혼자 꽃 보며 사는 재미로 쉬는 날엔 밖을 모른다는 꽃 주인 늘 행복한 표정이다 다달이 다른 얼굴 탄생화 재미난 요정의 꽃 이야기 세상 꽃이란 꽃들 다 모여 저마다 트는 꽃자리에서 휴지처럼 꾸겨진 꽃봉오리가 첫날밤 새색시 족두리머리 떨잠나비 잠 떨리며 핀단다 그 꽃 중에 으뜸인 보랏빛 미스 킴 라일락은 정원가득 계절 향기로 그윽하고 하늘 나는 매 발톱 푸른 눈초리, 이 땅의 순박하고 착한 이름 동이 나물, 으아 으아한 연둣빛 큰 으아리, 그 잎을 만지면 허브향이 나는 허브 꽃, 화려한 꽃 고명 장식으로 비빔밥에 얹히기도 하는 철학적인 명상가 ..

제비와 참새 2022.08.17

울고 있는 가을

얼마나 절절한 울음이면 추녀 끝에 주저앉은 별처럼 그 긴 밤 세워야 이 계절 다할 수 있을까 회색빛 걸치고 숨어든 도시의 빌딩숲에서 배회하는 주변의 밤은 유혹의 밤 거리요 하룻밤 풋사랑을 판다며 핑크 전단누드 보이는 여인의 명함들이 이른 낙엽처럼 나뒹굴어 댄다 담배꽁초 문 종이컵이 입술 꾸기며 욕지거리 하듯 침 찍찍 갈기는 뒷골목 부르는 소리 아무도 없는 외로움 떠나버린 움집에서 무서움에 집 나온 풀벌레들이 슬피 울부짖으며 떨고있다 10월 ​

제비와 참새 2022.08.17

황새 여울목

황새여울목을 돌며 (강원도 동강) ​ 어린 임금이 유배된 한 많은 영월 땅 푸른 물길 따라 정선 아우라지엔 늦은 겨울이 하얀 이불에 덮여 있다 어름치 물고기 비늘이 반짝이는 비단 폭 같은 *어라운이라 거슬리지 못할 세월의 물살처럼 뒤로 넘어지는 물길 된 꼬까리 황새 여울목 돌아나가며 뗏목 배 타고 서울 마포나루로 소금 팔러 떠난 님 구성진 뱃노래 가락 산 돌아 물 돌아 구를 비 돌고 도니 귓가에 아련하고도 익구나 흑백사진 속 남아있는 따스한 만지산 나루터 객주 집 전산 집에서 술상 차리던 아낙들의 매운 눈물 찍어내던 치맛자락 설움 많던 그 옛날 정두고 간 주막집 마다 아라리 아라리요 바람처럼 떠돌든 님 기다리며 뗏목 배 띄우며 살던 일이 지난 세월 한 자락 모질게 끊어낸 전설로 남는다 *여기저기 1~2월..

제비와 참새 2022.08.17

광화문 시위

뒤흔드는 자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 생사의 기로에 선 서바이벌 게임이다 눈이 왕방울만한 암소가 길길이 날고 뛰고 그야말로 인정사정 없어 기수는 죽살이로 매달린다 안장이 없으면 어때 지금은 그저 1분만 더, 1분만 더, 국민의 흥미를 위하여! 흔들어라 그러면 떨어질 것이다 붙들어라 그러면 살아날 것이다 세상에 요지부동도 없고 성한 놈도 없는 법 살아나도 너덜너덜 떨어지면 개망신이다 물고 물리는 소란한 볼거리 끊임 없는 투우가 이어지는 광화문 특설무대 무시로 ​

제비와 참새 2022.08.17

짜식들---ㅇ

새끼여 번성하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새끼들이 새끼줄처럼 새끼를 쳐 그야말로 세상이 너무나 잘 돌아간다 이야기이고 말인즉슨, 태양은 은하계 새끼 지구는 태양의 새끼 달은 제 돌기하는 지구의 새끼 혼외정사婚外情事 별똥별 살별*새끼들 사람은 아담과 이브의 새끼 어허이~허이 짐승이란 게 또 어떠하니나 양물과 엘레지*로 흘레하니 호랑이새끼는 개호주 곰 새끼는 능소니 소 새끼는 송아지 암소뱃속 탯 송아지는 송치 말 새끼는 망아지 숫 나귀와 암말잡종은 버새 닭 새끼는 햇병아리 꿩 새끼는 꺼벙이 어허이~또 허히 물고기란 게 또 거 이상허네 수컷 하얀 정자라나 뭐라나 풀치는 갈치새끼 껄 대기는 농어새끼 꽝 다리는 조기새끼 간자미는 가오리새끼 고도리는 고등어새끼 어허이 또 또 허이~ 푸성귀 나무들은 어떠한..

제비와 참새 2022.08.17

화석

그대 세상 살면서 뜨거운 것 한 번이나 물컹하도록 밟아 본 적 있는가 일억 년 전 몇 천도의 용암 그 마그마를 식히던 여름날의 짧은 소낙비였을까 바위 서책에 암각된 눈먼 비의 발자국들이 누군가 점자를 짚어가듯 비의 문장들도 살아있고 죽음도 꼿꼿하도록 저렇게나 뜨겁게 맨발로 건너갈 때 한줄기 시원한 판독 기억되는 비의 화석 남는다면 가슴 두드리는 빗발 같은 시詩 시詩의 화석이 되기까지 얼마나 뜨겁게 사람의 심장을 활화산처럼 녹여야 하는 건지... 8월 ​

제비와 참새 2022.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