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문학(詩,文學) 37

봄을 차리다

숲속 그 달디 단 꿀벌의 집 겨우내 닫혔던 육각의 창 열고 복숭아 빛 붉은 뺨 연둣빛 봄 향기 불어오면 그대 꽃무늬 앞치마 둘러 우리 모여 앉을 식탁에 햇 봄을 차리세요 봄비의 리듬을 뿌린 향료에 초록 버무릴 은쟁반을 놓고 화덕에서 지글지글 타기 전 봄을 뒤집어 익히세요 아~참 그리고 포도주를 내 오세요 깨지기 쉬운 유리잔은 위험해요 핑크빛 사연을 뜨악하게 그대 앞에 엎질러도 보세요 봄 뜰엔 꽃들의 음악회가 열리고 전선줄 오선지엔 잇딴 음표 새들이 봄노랠 들려준다면 좋겠지요 노란 나비 넥을 걸고 잉잉 거리는 봄 속에 서 있을 그대 간지럼 타는 겨드랑이 쯤 떡잎보다 꽃등을 먼저 켤게요

겨울 추억

미나리꽝 논둑길 아래로 살얼음이 깔리는 저녁 휘영청 달빛 비추는 샛강을 따라가다 보니 외줄기길 끝에 선 빈 오두막집 한 채 서있다 서리 맞은 국화꽃이 집안에서 홀로 질 적 글썽글썽 별빛들이 돋아나고 억새들 손 흔드는 인적 드문 간이역에선 누군가가 떠나는 밤마다 잠 못 들던 기적소리를 듣는다 얼어붙던 샛강이 쩡 쩡 쩡 밤새 울고 있다

비야 내려라

희미한 첫사랑 보일 듯 말듯 안개비야 빗물이냐 눈물이냐 는개비야 성재희 가수가 슬픈 곡조로 어루고 달래던 추억의 보슬비야 모내기하던 무논 자리 거북등처럼 갈라진 논에 지독하게 오기싫어 올랑가 말랑가 석 달 가뭄에도 망설이던 가뭄비야 일 년 농사 흉년 든 가실 끝내고 추녀끝에 쭈그려 앉은 큰 머슴 세경 달라던 구슬비야 그치라고 호통친다 그치더냐 장마비야 이산저산 꽃다진다 휘몰아치던 싸리비야 이쁜사람 있어라고 잡고 늘어진 이슬비야 미운사람 등떠밀어 가라던 가랑비야 비 새는 골방에 숨어 훌쩍훌쩍 울던비야 임 떠난 빈방에 울먹울먹 그치던 비야 매매 들던 아이 뚝 그치던 호랑비야 봄볕 양지에 앉아 이 잡던 홀아비야 간장독 된장독 뚜껑 닫거라 소낙비야 처갓집에 닭잡듯이 몰아치던 마구비야 구멍난 술잔 철철 차고 넘쳐..

*홀아비 꽃대를 흔드는 바람

백 등꽃 사월의 담장 밖으로 주르륵 꽃 타래 흘러내리고 은방울 소리 낭랑히 들리는 그 남자의 꽃 대궐을 열면 오죽 댓 닢 푸르름 아래 사랑하던 식솔들 다 떠나보내고 혼자 꽃 보며 사는 재미로 쉬는 날엔 밖을 모른다는 꽃 주인은 늘 행복한 표정이다 다달이 다른 얼굴 탄생화 재미난 요정의 꽃 이야기 세상 꽃이란 꽃들 다 모여 저마다 트는 꽃자리에서 휴지처럼 꾸겨진 꽃봉오리가 첫날밤 새색시 족두리 머리 떨잠 나비 잠 떨리며 핀단다 그 꽃 중에 으뜸인 보랏빛 미스 킴 라일락은 정원 가득 계절 향기로 그윽하고 하늘 나는 매 발톱 푸른 눈초리, 이 땅의 순박하고 착한 이름 동이나물, 으아 으아한 연둣빛 큰 으아리, 그 잎을 만지면 허브향이 나는 허브꽃, 화려한 꽃 고명 장식으로 비빔밥에 얹히기도 하는 철학적인 명상..

홀씨가 되어

(세월호) 바람 따르는 민들레 홀씨처럼 우리의 품에 당장 오지 못하드래도 그곳에 살아만 있어달라고 노란 리본을 갯가에 내걸며 통곡으로 지새운 기다림의 시간 이제 흐린 파도에 쓸려만 가고 차가운 바다 속에서 끝내 싸늘한 주검 되어 돌아온 아이들 검은 영정 액자 속에서 너희는 하얀 국화꽃처럼 웃고 있다 실종의 이름표를 달고 바다 속에 남아있는 아이들 남은 자의 피맺힌 절규 듣느냐 아직 못다 준 것이 많다는 우리의 슬픈 눈물을 아느냐 너희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살고 네가 죽으면 뭐할꼬 아! 이 참담한 세상, 토사처럼 무너진 헛헛한 가슴에 너 없는 무엇 하나 오롯이 담아 튼실한 희망의 싹 키울 수 있을까

너와집

구절초향 절리절리 산절리그리움 떠난 산길 오르면발뒤꿈치 따낸 산 아래짓누르는 돌덩이 얹은 가슴을 밀며긴 도마뱀 꼬리 끊긴 산비탈그 누가 와서 처마 끝 제비집과서로 외로운 정 나누며 살다 갔는지허름한 너와집 한 채가꾸벅꾸벅 졸음 겨운 한낮을 졸다 귀를 세운 굴둑으로쿨럭쿨럭 게워내는 연기꽃대오리 듬성한 여백의 문살산 꽃잎 다북히 찍힌 창호지 사이를야생화 자줏빛 향기 머금은 산바람이슬금슬금 그 자리 빠져 나간다어디 말 물을 데라곤우직한 기억 담고 있던 빈방멈춰진 벽시계는 수염이 자라고녹슨 시간 지탱하는 돌쩌귀들은덜컹덜컹 문짝 물어뜯는다 따뜻한 온기 머물던 부엌곰팡내 나는 시간이 나뒹글고우묵한 고요 삼키는상치며 쑥갓이 자라던 묵정밭낙서처럼 헝클어진 잡초 무성하니누군가 돌아오는 인기척조차 없어작은 내 헛기침에와락..

목욕탕에서

무더운 여름 지나고 서늘한 가을이 깊은 날모처럼 온탕에서묵은 때 벗겨본다손닿지 않는 뒷등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이얼마나 낯설고 아득한지느껴본 사람은 알 일이라 등 따돌려 보던 사람들열기에 흘러내리던가렵고 싸늘한 눈빛들이표창처럼 와 박히던 순간가눌 수 없는 쓸쓸함에등 기대오는 여느 아침 긴 하루 조여 오던푸른 등뼈의 사슬서 풀려나가쁘고 고단한 숨고르기처럼총총한 별꽃하나 돋지 않는시린 우주의 북벽이막막한 그리움의 한계령에돌아설 수 없는 뒤편으로 가다한 번도 너에게 흐르지 못한긴 강물 되어 뒤척이겠다

석류의 계절

두꺼비 기어 나오던 배불뚝이 장독대를 돌면배롱나무 꽃 꼽고나온 날차라리 아픔이든가붉은 설움 보이던붉은빛 등명燈明을 켜고허운데기 풀어 금지된 사랑빗질 없이 한들 한들거려바람 따라오던 머시마 풋정으로 살다가을비에 젖는 꽃생생한 곡비哭婢소리에불을 끄지 못하던잠 못 든 마을 담장마다대낮처럼 찾아와스스로 피고지는 비명제 설움에 지친계집종 울음 같은서러운 배롱꽃 이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