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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 포두면의 유래

서문섭 2019. 11. 5. 13:05

고흥군 포두면의 유래

□ 연혁                     

- 757년 보성군
- 1441년 흥양현
- 1895년 포두면
- 1963년 오취리 편입
- 1990년 송산출장소 개소
- 1998년 송산출장소 폐지 
□ 지역특성
- 고흥반도 동남부에 위치하여 군내 읍면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음
- 경지면적은 3347ha로 군전체의 16% 해창만 간척답등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어
   양질미 생산지
- 시설원예 재배단지화 및 잘발달된 해안 간사지를 활용한 바지락, 굴수하식
   양식이 활발 주민소득 높은편임 
 
남성리 - 익금, 남성】 
익  금 (益金)
마을앞에 모래가 많이 쌓이는 해안이 있어 長沙里라고 부르다가 어촌지명으로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하여 뒷산 지형이 六拘尾(여섯마리개의 꼬리가 모인 形局)이라는 뜻에서 六拘尾리라 하였으며 그후 개모양에 의한 지명으로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다하여 발음이 비슷한 益金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포두면의 가장 남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남  성 (南星)
남성마을은 옥강리를 연결하는 城터(지금의 馬牧城)가 있고 이城을 옛날에는 南浦城이라 부르다가 南星으로 바꾸어 불렀는데 조선말에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쪽 하늘의 老人星이 비춰주어 장수(長壽)하는이가 많다는 뜻에서 南星이라 부르고 있으며 南星里의 中央마을로서 포두면내에 가장 큰 마을이다.
【옥강리 - 우산, 내초, 외초, 봉암, 정암】 
우  산 (牛山)
원래 옥강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옛날마을 부근에 소를기른 목장이 있었고 마을앞이 바다이므로 "牛牧浦"라 부르다가 1936년 일제시대에 마을을 한자화할 때 마을 뒷산이 臥牛形이라해서 牛山으로 바꾸어 1986년 법정마을로 독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  초 (內草)
외초마을과 경계지역의 산모양이 새머리와 같다고하여 "새두"라 하였고 옛지도에는 두마을이 草梁이라 表記되어 있는데 草梁의 안쪽마을이라는 뜻에서 "안새두"라고 불렀는데 1936년 마을명을 한자화할 때 內草라고 개칭한 이래 법정마을로 독립되어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  초 (外草)
처음에는밖에   있는 마을이라해서 "바깥새두"라 하였는데 그후 草梁의밖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1936년 일제시대에 마을명을 한자화할 때 外草라고 불렀으며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  암 (蜂岩)
원래 옥강리의 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東南쪽에 "까막재"가 있다고하여 烏峙라고 불러왔으며 마을 뒷산중턱에 벌바위가 있다고하여 蜂岩이라 부르다가 1980.1.1부터 자연마을로 승격 독립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  암 (亭岩)
옥강리 외초에 속해 있던 마을로 지금부터 70년전 일제시대에 진흙을 빚어 기와와 옹기를 구운곳이라하여 "와등"이라 부르다가 해창만 간척지 개답후 외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마을뒷편 바위가 많아 1987년도에 자연마을로 승격시 亭岩마을로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차동리 - 신촌, 내산, 외산】
신  촌 (新村)
원래 차동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設村당시에 당산골 주민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새터에서 영원 무궁한 마을로 번창된다는 뜻으로 新村이라고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87년도에 자연마을로 승격됐다. 
내  산 (內山)
원래 차동리지역에 속하며 마복산(馬伏山)골짜기에 두 개의 마을이 있어 산내(산안에 있는 마을이라고 부르며 두마을의 안쪽에 있다고하여 "안산내"라 불리어 오다가 1936년 일제시대에 마을명을 한자화 할 때 안산내를 內山으로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  산 (外山)
원래 차동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마복산 골짜기 아래 두마을중 남쪽바깥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큰산내"라고 불리어왔으며 1936년 일제시대에 마을명을 한자화 할 때 마복산 좌측 주변의 기암괴석과 산수가 어울리는 남쪽밖에   위치한다하여 外山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동리 - 원세동, 장촌, 양지 미후】 
원세동 (元細洞)
확실한 설촌연대는 알수 없으나 원래 金, 林, 崔씨의 三性이 숲몰, 참샘몰 양쪽에 각각 정착하여 村名이 "龍洞"으로 불리다가 70~80여년전부터 가느다란 골짜기에 있다는 뜻으로 "가는골"이라 하였으며 같은뜻으로 細洞이라 부르다가 細洞里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元細洞이라 改稱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  촌 (長村)
자세한 設村과정은 알수 없으며 1910년 한일합방전까지 마을을 藏財라 하다가 일제시대 長村으로 불렀으며 옛날에 長者가 살았다고하여 오래 富村繁榮한다는 뜻에서 해방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시 長村마을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  지 (楊地)
망덕산 양지바른 기슭에 형성된 이마을은 건너편 米朽마을을 풍수지리상 음지(陰地)라 하고 이마을을 陽地라하다가 1954년 회관이 전소된후 마을지명이 불길하다하여 1956년 리동행정구역정리시 陽을 楊으로 바꾸어 버들양자로 써서 마을명을 楊地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미  후 (米朽)
원래 세동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명을 처음에는 佳山이라 부르다가 한일합병 이후 농경지가 확대되어 마침내 곡창을이루자 창고에서 쌀이 썩을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다 하여 불리우던 마을이름 "사시기" "쌀새기"를 한자화하여 米朽로 개칭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길두리 - 봉덕, 덕촌, 안동, 전동, 후동, 신흥동】 
봉  덕 (鳳德)
마을앞 섬이름을 본따 "대섬"이라 부르다가 1700년경 지리적으로 마을앞 대섬에는 대나무가 무성했고 그앞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는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았다는 새를 비유하여 "봉황새"만이 살곳이라하여 "鳳"字를 썼고 새가 하늘높은 곳에서 세상에 德이 빛남을 본후에야 인간이 나타난다하여 "德"子를 썼다고하며 또 마을뒤에 비봉산이 솟아 있고 마을앞 해창만의 덕을 입는다는 뜻에서 비봉산의 鳳과 德이 합하여 마을 명을 鳳德으로 改稱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  촌 (德村)
원래 길두리지역에 속한 마을로서 조선시대 말엽에는 큰골이라 불리어 왔으며 해방후 정일권 전국무총리가 마을명을 自活村이라 명명하였는데 1979년 고흥군 부군수 김철환이 德을 크게쌓을 마을이될 것이라하여 마을명을 덕촌이라 개칭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  동 (雁洞)
원래 안골(內洞)이라 칭해와으나 약 300여년전 입향조인 丁世胄의 子인夏協의 호를 雁洞이라고 한데서 연유 되었다고하여 마을의 地形이 기러기가 알을 품은 것 같다는 뜻에서 또는 老瓮垂釣形局 즉 늙은이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으니 해가 거듭할수록 고기바구니가 가득할 것이니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릴것이라고 해서 마을 명을
금사 (金砂)
원래 봉림지역에 해당된 마을인데 천등산 자락에 위치하고 금탑사(金塔寺) 아래있는 마을로서 옛날 이산에 금빛나는 암석(또는 탑)이 있고 마을에 모래가 많아 金砂里라고 불렀으며, 금탑사 아래 입구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동구라고 불렀으나 일제초기에 金寺里 또는 金砂里라고 표기하였고 해방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되면서 마을명을 金砂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수리 - 원장수, 연등】 
원장수 (元長水)
원장수리 중앙에 해당되며 마을의 地形이 고흥읍 호형리에 뻗어내린 山이 노루머리와 같다고하여 獐首라 부르다가 마을앞 長水川의 이름을 따서 長水로 개칭한 이래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으뜸마을이라하여 元長水로 하였고 1985년도에 장수저수지가 시설되면서 연등리지역으로 옮겨 새터를 잡아 현재의 마을이 形成됐다. 
연  등 (蓮嶝)
원래 장수리지역에 해당되며 마을 뒷산이 경사가 급하여 소가굴러 떨어졌다하여 "두락"이라 부르다가 마을앞에 鍾沈淵이 있고 마을의 산등성이에 위치한다하여 蓮嶝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포리 - 평촌, 중흥, 자연동】 
평  촌 (平村)
원래 상포리지역에 해당된 마을로서 해창만 바닷가의 입구(머리)에 위치하므로 "갯머리"라 하였으며 벌판에 있는 마을이므로 平村이라고 개칭하였으며 마을앞 삼거리 도로는 국도 15호선과 지방도 855호선과 연결된다. 
중  흥 (中興)
원래 상포리지역에 해당된 마을로서 약500여년전 마을뒷쪽 두원면 운암산 중터에 中興寺라는 큰절이 있어 절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中興이라 이름하여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동 (紫烟洞)
옛날 이마을에 紫烟濟라는 큰 서당이 유명하여 紫烟洞이라 불리어왔으며 본래 이곳은 조선조때 고흥지방의 광물의 일종인 自然銅이 채광된 곳으로 추측되며 自然洞이 紫烟으로 바귀었다고 한다. 
【남촌리 - 원남촌, 당산】 
원남촌 (元南村)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폐합시 남촌리 일부를 상포리에 이관하고 남촌리로 독립행정리가 되었으며 南村이라는 지명은 남쪽을 바라보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마을의 중심을 "각정"이라 하였고 위치가 남쪽을 바라보는 마을의 중앙지이므로 마을이름을 元南村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  산 (堂山)
원래 해창만 포구(浦口)에 있는 마을이므로 "海倉"이라 하였으며 부락 뒷산에 堂이 있어 堂山으로 바뀌었는데 해창은 興陽縣 남부일대에서 나라에 바치는 양곡과 해산물 및 특산물을 보관운송하던 곳으로서 대서면의 松林倉과 함께 흥양현 15리 바닷가에 있는 흥양현 2개창고중의 하나인 松串海倉이 있었던 역사적인 해운수송의 요충지였음. 
【송산리 - 동촌, 신월동, 서촌, 동산동, 만화】 
동 촌 (東村)
옛날 이곳 인근에 "각정"이라는 곳에서 동쪽에 위치하므로 東村이라 불러왔다고 하며 점암면 천학리과 접하고 있는데 1986년 법정마을로 독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바다였으나 해창만 간척지 개답후 타지에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이곳에 정착한 후 1988년도에 新月洞으로 명명 자연마을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 촌 (西村)
옛날이곳 인근에 "각정"이라는 곳에서 西쪽에 있어 西村이라고 불렀으며 포두면의 북쪽 끝에 운암산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임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산동 (銅山洞)
골짜기의 지형이 마치龍이 숨어있는 形局이라하여 "龍隱谷"이라 하였는데 약 150년전부터 이곳에서 고흥지방토산물의 일종인 自然銅이 채광되었다고하여 銅山洞이라 불러왔으며 1959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만화 (晩花)
약 300여년전 이마을 샛터에 晩花亭이라는 유명한 정자가 있어 마을이름을 晩花亭이라 불러왔으며 1956년에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된 후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점암면과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오취리 - 상오, 신오, 오취, 달성】 
상오 (上梧)
옛부터 北쪽에 있는 吉頭里 飛鳳山에서 鳳의 새끼 자웅이 있어 飛梧桐이면 不棲하고 非竹筍이면 不食한다하여 鳳德앞에 竹島가 있어 梧桐이 잘 자라는 梧桐島에 鳳凰 자웅이 나라와서 숫鳳은 上梧에 암鳳은 翠島에서 둥지를 틀었다하여 蓬萊面 梧桐島라 칭하다가 梧翠里로 개칭했다, 그후 1956년에 上梧라는 자연마을로 독립 되었다가 1963.1.1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浦頭面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신오 (新梧)
원래는 상오마을에 속했으나 본동과 떨어져 있는 관계로 이행정 등에 불편함이 있다는 주민의 뜻에따라 1995.12.29 분동되어 마을명을 신오라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오취 (梧翠)
옛날 이섬에 鳳이 좋아하는 오동나무가 많고 鳳이 살았다는 전설에 의하여 이섬을 오도라 하였으나 1914년 일제초기 행정구역폐합시 마을명을 梧翠라 개칭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달성 (達城)
1925년에 형성된 마을로서 設村당시에는 "넉섬"또는 達島라고 부르다가 1986년7월1일자로 정식 법정마을로 승격되어 뜻을 모아 성공할 마을이라는 뜻으로 達城이라고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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