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산문시(自由, 散文詩)

장독

서문섭 2019. 9. 13. 11:22

전라도 땅, 고흥이란 곳에 가보게 되면
동강면 매곡리에 자리하고 있는 매곡교회가 있다
필자의 고등학교 1년 선배인 정도순 목사가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교회다
아담하게 지어진 교회도 교회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서게 되면
수많은 장독들이 금방 시야에 꽉 차 들어온다
큰독  작은 독  긴 독  짧은 독 그야말로 모양새도 천차만별이다
색깔도 다양한 게 검은 독 누런 독 검붉은 독
각양각색의 독들이 끝을 가늠하기 모르게 놓여있는데
어림잡아 수 백 개는 되는 것 같아 보인다
독들은 무엇을 느끼는 중일까
햇살이 장독의 푸짐한 몸뚱어리에 쪼이면서
더욱 넉넉하고 온순한 빛으로 번지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보건대 장독은 숨을 쉬고 있는 우주를 연상케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간장이건 된장이건 그 안에 발효 중인 세계가 있음이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빼곡히 마당을 차지해버린 독들은 그냥 똑바로 서 있을 뿐이다
굳게 닫힌 뚜껑과 귀를 닮은 손잡이 그리고
그 자리에 선 채로 하염없이 시간만 보내는 게 장독들의 전부다
시간과 공간속에서 그저
모든 흐름에 귀 기울이고 침묵하며 견뎌내는 장독의 몸짓이야말로
삶의 맛이 어디서 오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듯하다
따사로움과 추위가 반복되면서 발효된 세계인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성숙하게 익힌다는 것이야말로 긴 침묵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무언가를 삭이고 삭혀 얼마만큼의 맛을 내는 것은 절대 시간이 작용 한다
끈질김의 침묵 그리고 기다림이 진정한 쉼의 요소일 것이다
말을 조심하며 줄이는 일이나 귀를 기울이는 조용함,
그리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우리는 물론 오늘 나만의 마음을 쉬게 하는 귀한 것들일 것이다
하나하나의 장독처럼 발효가 잘 되어가는 삶이 된다면
그것은 바로 진정한 맛과 냄새를 풍기는 풍요가 되지 않겠는가
잘 익은 간장 된장은 모든 음식에 간을 잘 들게 하고
생명에 무수한 빛깔을 준다
맛있는 삶이 우리를 매력 있게 하듯이
일렁이는 향기는 삶을 다사롭게 하는 힘이며 원천이다
자기를 익히는 것으로 인해 남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퍽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주를 잉태하듯,
장독의 둥근 배는 무언가를 잉태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나의 발걸음을 유혹하려는 것이다 
그런 계절로 잉태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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