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 5집

제 5집

서문섭 2024. 10. 8. 09:46

팔영산

여덟이나 되는 봉우리에
바위 꽃인지 이끼꽃인지
바람에 살부비며
아롱 아롱 피었다
봄볕 게릴라처럼 스며든
편백이 울울창창
얼음 녹아 흐르는
눈석임 어릿어릿한 길을
자분자분히 걸으며
꽃봉오리 깨우듯 지나간다
팔영의 기이한 산 준령이
하늘 강 건너는 징검다리로 보이다가
이따금 얼핏 연꽃숭어리로 보이더니라
신비한 이방인의 눈처럼
해창만의 푸른 눈빛과 마주치며
먼 산 단숨에 달려오는
선녀봉 유영봉 살짝 지나서
귀에 익은 옛 관악기 생황소리 접한다
어느 신선이 내려와 입맞춤 했을까
파르르 떨리거나 걲어지며
열일곱 대통 속 흐르는 생생한 울음
그 소리에 내가 어이
애잔한 마음이 없을손가

동백섬에서

우산을 두드리는 는개비가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가늠이 어려운 동백섬에서
어디서인지 모를 꽃향기가
빗방울에 은은히 젖어든다
꽃송이에 부리를 대고
동백류를 빠는 건지 먹는 건지
이리 꼬고 저리 돌리면
나무는 가만 있어도
작은 동박새가 움직임 만든다
꽃과 새 하나 되어
향이 짙고 향기롭다
미적미적 옆에 서서

시간을 보내보는 거다

미포길에서

철길을 지나다 보면
철대문 헐어있는 낡은 집 한 채
아직은 봄 가꾸지 않았는데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우아하게 깃을 치는
참새 떼 날아와 앉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함
저러듯,
어두운 검은 손
잡초 우거진 마당에서
빈집 털어 한 몫 챙긴다면
향기로운 꽃그늘 담보로
꽃이든 새이든
삶이 그리 별거라든가
봄만이 행복할 일이지

울산 태화강에서

성은 양이요 이름은 귀비
유월의 울산 태화강 둔덕에
절세가인 십팔 세
유혹의 *양옥환이가 꽃을 피웠다
물빛 어리는 꽃다운 자태
삼천이나 넘는 궁녀처럼
매년마다 향기롭게 피어나도
네 앞에선 부끄러워 고개를 떨궜을까
정렬의 붉은 치마폭
난세에 흔들거리는 위태로움
예단 못한 풍전등화일 뿐이었는데
영혼마저 마비된 사랑아
입술에다 맹독을 지녔다드냐
사랑하던 사람 안록산은
반란의 칼끝 휘둘러
초여름 가랑비에 추적추적
황급히 내몰리는 피난길
피붙이 일가족 남김 없이
모두 다 죽어가는 모습에 놀라
타래 진 명주실 비 비 새끼 꼬아
이화란 나무에 목매는 귀비 좀 보소
치렁한 검은 머리 풀리어
꽃 비녀 나뒹굴어지는데
옥가락지 곱던 맹세 배반의 꿈 꾸며    
비취 깃 꼽았던 그 시절을
그 뉘 부럽다 하였을꼬
부귀영화 온몸에 누렸건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니
애달프다 무슨 소용인가
그릴 것 하나 있어 백거이의 장한가라
며느리면 어쩌랴 비면 족하리
현종의 치정에 얼룩지는 피눈물
긴 긴 밤 이슥토록 눈물 지세고
차가운 안개꽃만 침전에 만발하니
불면의 꿈길에서나 만나볼거나
어디에도 간 곳 없는 사랑아
전설처럼 한 시대 희롱하며 살다간
황홀한 꽃 빛 바라보던
먼 서역 당나라 땅 미인박명
스스로 목숨 꽃 거둔 난세
요절한 절세를 안타까워 하노라


*양귀비의 본명

후쿠오카에서

푸른 물결 노래하던 바다

파도치는 붉은 피 헤치고

작은 신神이 바다를 건너간다

자유 흐르던 바닷물에

통곡의 영혼들 물안개로 피고

휘저어 피맺힌 숨결 사이로

수천수만이 강을 건너가듯

이내 몸 하늘에 몸을 맡기다

심장 노리는 총소리에

물새들 모두 떠나가고

날치 밭에 백구白鷗 우는소리만

잊어버린 파도 이랑 슭

아직도 울고 운다 오늘도

지구를 돌리는 태양이

새신랑처럼 떠오른 어둠의 편

물굽이마다 일어나

춤추고 노래하는 날

별빛 숨는 캄캄한 밤이래도

이 죽어 아침을 만들 것이다

그날 오기 전

후쿠오카여 부르거라

높이 솟아나라

나와 동행하신 신을 보거라

겨울꽃

추위에

욕봤습니다

겨울을 참고

곱게 피어나느라

 

고맙습니다

올 줄 알고

기다려주셔서...

시월의 저녁놀

어느새 이쯤인가 싶어

쇠하였다는 느낌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

세월 흐름도 잊었는데

마음으로 느껴보는

해넘이 같은 인생

빈 가지는 무성하나

열매 없는 나무

 

남아있는 것은 단지

무성한 이파리일 뿐

주황빛 노을

서향 기운 아쉬움

*상달 아래 시커먼

검은 그림자로세

 

*햇곡식을 신에게 드리기에 가장 좋은 달

노년의 일기

거무튀튀하구나

내 얼굴이


~욱 쉬었네
내 목소리가


고희를 넘은 흔적이라서

외려,
그렇지 않음이 이상할 터
서글퍼하지 말자


가을이 깊어지면 열매가 지고
땅에 떨어져 새싹으로 돋으니

쉼 없는 일상

밤낮 없이 뛰고 달린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를 악물고 달린다

어두워도 달리고

날이 밝아서도 달린다

조용할수록 티 나는 질주

길들어진 거친 야성이

본 인격을 흡반처럼 달고

힘을 다해 달린다

 

절룩거리며 달린다

힘겨워도 달린다

야유와 조소를 씹으며 달린다

끝을 모르고 달린다

그냥 달리기 위해 달린다

경주로를 벗어난 적 없는

나는 쉼 없는 길을 달린다

세월의 무게

어디서 찾을 것도 같은데
신기루란 말이든가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세월
흐릿한 눈으로
아쉬운 듯 하늘을 바라본다
일기장 같은 목록의 글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는지
덧없는 모습 눈에서 어른거린다
오래된 기억
되돌아보기엔 때늦음이
나를 멀리하려는 모습 땜에
머리가 혼돈스럽고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아직은 청춘인지
장엄한 노을 붉은 향연 위한
따뜻한 추억 그만큼만
낱낱이 걸린 채
그것만은 남아 있잖은가

해몰海沒

노을 젖은 수평선
남겨진 것 하고는
아직 뜨거운 사랑
그리고 정
금빛 휘황찬란한 세월 위로
파리하게 스러져가는
안타까운 시간들
몇 번을 반복하면서
너는 또 다시 살아나는가

너처럼 살겠다는 욕심이 울컥
얼마나 간절함이 있어야 할까
얼마나 사정해야 그 꿈 이룰까
문신처럼 일그러진 생채기
남겨진 것 뒤란 되어
가만가만이 사위어가는
잊혀서 지난 이야기들

저것들이 뒹굴며
죽음을 부르는가

봄이 오는 소리

희멀건 하늘 힘들어 고개 넘는

겨울 산 둔덕 아래
천 갈래 만 갈래 빛살이 내리꽂혀
생명의 불꽃 타오르는 소리
아지랑이 연기로 피웠다
그래서 오르고 오른다

제 스스로 봄을 만들지 못한 땅
꽃을 뿌리는 저 시간의 촉수들
어둠을 빛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영혼의 기도 속에
차가운 얼음 속 쏘아 보낸
눈물의 함성

휘몰아치는 폭풍우
검은 구름 광란의 바람 헤치고
어느새 봇물 터지는 부활의 강물
봄은 그렇게 우리 곁에 오고 있었다
불면의 밤을 지나
마침내 새 몸 입고 향기로 오는
부산한 발자국

난 먼지야

산다는 것은
먹고 마시고 자고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웃기고 자빠졌네
나에게 산다는 건
세상 어딘가에 붙는 거야
아주 깨끗한 곳이면
나는 어디든 좋아해
재수 없어 더러운 곳에 붙으면
더럽다고 금방 붙잡혀서 밀려나지
깨끗한 곳에 붙으면
더 더러워질 때까지
안전해
난 먼지야

한잔의 커피 (루아우)

한잔의 커피를 나누고 싶다

알알이 뭉쳐있는 똥고집들
너끈히 명상에 잠긴 듯한
물속에서나 풀어져야 할
하늘땅 맞붙어 도는 틈 사이를
아찔하게 빨려 들어가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야 할 것,

달구어진 물병 온도에서
찢김까지 참아내야만 한단다

부드러운 양심을 우려낸
잘 섞인 흰 크림 덩이들
변질도 죄드란 말인가
누런 설탕 달착지근한
축복의 성수가 이윽히 뿌려지고
맛의 진화가 드디어
부드러운 한 컵 시작을 위한
웃음 한 방울 물기를 쥐어짜며
다시 뜨겁게 뭉쳐지는 소신,

한 잔의 성찬이듯
다과 살점 뜯으라 전하는
커피 타는 아낙의 코너
그대의 오지랖 넓은 소리가
종교처럼 깊은

성스러운 아침을 흔들어 깨운다

사람의 마음

미워할 거야

그냥 아무튼

미워하지 않으려 해도

섭섭한 마음이 들어서

괴롭거나 속상해지면

그냥 미워할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욕심이 아닌 솔직한 감정이지

그러니 우선

내 감정부터 위로할 일이야

백합화

소복 단장한

도톰하고 희디흰 매무새

절조로운 꽃술에

聖水의 祝福을 기원하는

별이 숨은 아득한 눈 나라

 

세찬 비바람에

가시로 찔려도

그 먹피 가슴에 묻는다지

낙엽 1

더위가 가신 어느 가을,

시절을 탓해 바람을 탓해?”

삼사 오월의 새 푸른 소녀가

유월 칠 팔월에 무성한 숙녀라면

구시월 넘어서는 이를

어떻게 불러야 맞는 말일까

비바람 강설 맛보고

두려움 없을 것 같은

우리 마누라와 같은 여자

그래도 여인네라

오색 빛 온몸에 두루 휘감았어

마음 문 열어 들여다보니

~욱 뚝 이미 이별이네

낙엽 2

작금昨今의 시간과 공간에서
푸르렀던 옛적 속삭임이
이별과 아쉬움으로
가을에 물들어 있다

붉디붉은 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이 황홀한 선물
인색한 세월 속에서도 그나마
허심을 달래주는 정겨운 선물이려니

누천累千 빛깔로 물들어
쓸쓸한 거리와 마음을 덮어준다


거센 비바람 맞으며
하염없이 지샌 여정
헤어질 수밖에 없는
세속을 잃은 연인처럼

계절도 온화함도

모두 다 잊어버린 낙엽들

 

초로에 서서 문득

고운 자태 들여다보니

손짓하며 헤어지는 듯

하나둘 이별을 고하고 있네

가랑잎

오밀조밀 늦가을이

햇볕을 쬐고 있다

황혼 저만큼

*누천累千빛깔들

땅에 부토 되어

떼 옷 입고 눕드래도

아직은 파르르 떨며

가지에 매달려 있다

언젠가는 뒤돌아보지 않고

놓아야 할 손

마지막 비행할 연습에

애처로운 저 가랑잎들

 

*여러 가지

갈대

까끌까끌 날리는

사무치는 연(붙잡고
어딘가에 마음 둘 곳 없는
한낱 허울이라는 것을 알기에
탈색한 겨울 죽도록 잡아 비틀며
갈꽃은 허공을 박차고 오른다
포효하는 야성의 성난 파도처럼
길섶에서 하늘거리면
흔들릴망정 꺾이지 않는다며
서걱이며 비틀대는 칼춤을 춘다
안달하듯 속삭이는 바람결
먼 산을 기웃거리는 동안
산이 안개를 벗어나 침묵하고
그 안개 천천히 길을 연다
나상의 춤사위 휘젓는
백포 갈대의 시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고고한 환희로 솟는다

더불어

인생이 별거라 생각지 말자

잠자기 전이나 잠 깬 오늘이나

아니면 또다시 잠든 후에도

흥미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체험하지 못한 것

익히고 살면 힘 되는 것

가파른 비알 길 오르다 보면

편히 숨 고르는 시간도 오고

내리막의 기쁨도 오니

그런 게 다 우리네 인생이지

더불어 생을 꾸리는 게 삶이지

홀로 만지작만지작할 수 없는 거

더불어 의지하고 살다 보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이웃에게 전해지며

그 이유 역시 내 삶이라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닌가

그 또한 지나리라

소낙비가 지나는
긴 긴 여름 장마가 지나듯
그대 삶 눈물 젖어도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
봄여름 지면 가을이 오듯
잠 못 이루는 밤
참을 수 없는 괴로움 있어도
그것 역시도 다 지나가리라
온 세상을 얻은 기쁨
행복한 날의 왕관도
깨어나면 꿈이라
그역시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운 사람 정든 친구들이
우리 곁을 스치어가듯
땀과 피 흔적 두엇 남기고
그대와 나 모두 지나치리라

그러려니

여로의 길목을 지날 때
맘에 합한 자 얼마나 있으랴


난들이야 남의 마음에
어찌 다 맞추며 살아질까


들어야 할 말들
칭찬만 들을 수 있을 런지
내 입에서 나온 말로
남에게는 상처는 주지 않을 런지
세상이 내 마음 알아서 챙기랴

옆에 있던 사람도 멀어지고
멀리 있던 사람도 가까워질 수 있으니
그러려니 하면서 사는 수밖에
그저 그러려니 하자

칠흑의 어둠 속에서

어스름한 서광이 비친다

과거는 가도 새날은

바로 오늘이다

시간 속에서 근심이 사라지고

슬픔도 지나간다

고통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

새 길을 열어준다

어제는 오늘이 아니고

오늘은 내일이 아니다

강물은 흘러가고

세월은 새 이야기를 엮어 간다

태양은 날마다 유장하게 떠오르고

별은 밤마다 다르게 빛난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간 속을 걸어가고

내일을 알지 못한 채

꿈속에서 신비를 바라본다

어둠에서 태어나지 않는 생명이 있으랴

차가운 흙 속에서 봄은 등불을 켜고

흑암과 혼돈 속에서

지구가 우주에 꽃을 피운다

신비한 미지의 시간

날마다 시작되는 오늘이

시작의 새 날이다

매화

떨켜에 불 심지를 꽂다니

 

봄이 널 흔들었구나

잔설 녹이다 힘들거든


부르거라 나를

모험

주저하지 말고

얼른 몸뚱어리 던져

이왕지사 세상에 태어났다면

눈치코치 볼 이유가 없잖여

세상은 이미 전쟁이질 않는가

이미 경쟁이 시작됐을 터

한겨울 하얀 박 쪽 보일 이유 없어

장차 우뚝 선 곳곳마다

성공의 깃발 꽂을 때까지

세찬 비바람에 맡겨도

환장한 비바람 지랄 염병을 해도

결코 굽어질지언정

꺾이지 않는다는 까닭을

애써 가르치고 싶어서

만나보고 싶은 사람

거리엔 온통 무거운 발걸음

시간에 쫓기어 허둥대는 자들

휘파람 소리 들리지 않는 곳에서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고 싶다
입가에 미소 가득한 이
눈가에 평화가 깃든 이
마음에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이

이슬 젖은 눈가에
어딘가는 행복이 있고
쓸쓸한 영혼에게
어딘가는 기쁨이 있다
텅 빈 가슴 채울 수 있다고
행복한 마음 퍼 담아 전하고 싶다

오늘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메모

일 년 중

중요한 날 알아야 할 날들을

구름에다 띄운 건지

유리창에 달았다 날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잊기가 십상

컴에 남기어도

어디에 두었는지 찾기 어렵고

손바닥에 얼른 써놓아도

일상에 지워져 알 수가 없으니

때때론 살아 있다는 것도 깜박

다만 괴로움과 슬픔은

어디에 적어두지 않아도

눈을 뜨거나 감고 있어도 힘들어

어디에고 찾아와 성을 가신다

오늘은 새해 달력에다

중요한 날과 알아야 할 날들을

빠짐없이 메모해 본다

동백섬 연가

어두운 밤에 별빛 주신

그 존재마저 기억하지 못한 날

동백섬 밤길 걸으며 비로소

밝은 날빛 생각하듯 고마워합니다

때로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해무 에둘러 쌓여있는 곳에서

아무 보이지 않는 어두움에 옷 입어

거친 치부 부끄러움 가리려 했습니다

차별이 없어 평등하다는 의미

멀어버린 눈과 닫힌 귀에 말합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 내 마음 찾지 못할지

또한 그대에게로 가는 길 잃어버릴지

당신은 어두움에 쌓여 뵈지를 않고

흑암의 함성은 너무 커

사랑의 음성 듣지 못하나 두려워합니다

밤 지나면 새벽이 온다는 것

칠흑 밤에도 이슬 은은히 내려

동백잎에 보석 달아준 공의로우신 자비

밤의 시간 헤아리고 섭리하신

덤으로 주신 안식의 은총입니다

내 영혼이

어둠의 밤에 야훼를 노래합니다

배롱나무

고추짱아 바지랑대 타던 날
배불뚝이 장독대를 넘나들면
배롱꽃 고운 천 같은
차라리 환희의 표상이면 어떨까
퍼즐 조각 붉은 볏처럼 보여
선연한 등명燈明이 걸리고
허운데기 풀어 매듯 약속한 사랑
빗질에 하염없이 하늘거려
기다리던 씨방에 정을 그리는
가을바람 속삭이는 불꽃
생생한 신음소리
밤을 태우는 사랑
담장마다 밤중처럼 찾아와서
스스로 피고 지는 소리
제 사랑에 지쳐서
풋 계집이 간지럼을 타는구나

가을밤

영혼까지 황홀한
오색 물들인 가을
밤벌레 울음소리에 실려
고독한 시간이 흐르게 하소서

잿빛 하늘 선회하며
힘겨워하는 새 한 마리
예배당 첨탑에 걸터앉은
안온한 마음이게 하소서

나도 모르게
외로움 밀려드는 밤
오롯한 사랑 숨 쉬는
풍요로운 마음이게 하소서

이슬 젖은 낙엽처럼
흠뻑 향기로 남아
갈색 꿈
물들이게 하소서

생명 강가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리

그 생명의 강가에서

손의 손 맞잡고 한가지로 기뻐하리

그 생명 강가에서

무릎 꿇고 우리는 경배하리

그 생명 강가에서

 

그대와 나란히 영광의 길 걸으리

슬픔 없고 아픔이 없는 곳

늙음이 없고 이별이 없는

영생의 물결 출렁이는 보좌 앞

그 생명 강가에서

우주의 비밀 풀어지고 신비 열리는

무궁한 생명이 있는

그 강가에서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우주 탄생의 근원
빅뱅의 원소가
험한 세상에 내려와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몸뚱어리의 흙과
호흡하는 기운도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
때가 되면 돌려줘야 할
다 그분의 것이거늘
채무자 신분으로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 한 푼도 낸 적 없이
칠십 평생토록 잘도 살았다


십 년이나 이십 년 후 즈음에
이자를 탕감해 주겠다며
원금만 갚으라는 으름장이다
아니,
더 빨리 갚아야 할지도 모른단다.

기다림

비 내리는 날이면

빗물 되어 오시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약속도 기약도 안 했지만

가을이 오면 오시리라 믿고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보고픔 그 하나만으로

말없이 기다려 온 당신의 향기는

그리움의 간절함 뿐이지만

행여 잊지는 않을까

내 안에 꼭 가둔 채

당신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고독은

때론 슬픔이기도 하지만

그 시간만큼은 고통을 멈추고

빗소리에 귀 기울여봅니다

행여 당신의 발자국소리 놓칠까 봐

소망의 길

인간 띠를 잡는다
고달프고 험준한 삶
이생에 가득한 꿈들을
긴 어둠 속에서 불러 모아
땅속에 흩어놓는다
이토록 방황이 되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누항의 그늘에 가려
가식의 소리만 요란할 뿐
내가 가야 하는 곳은
소망의 끄나풀 붙잡고
영원한 나라로 내달리는 것이다

사랑

그것은 그리움을 앓는 것
늘 목마른 갈증에 죽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것
하나만을 소유한 가난을 기뻐하고
너만 있고 나는 없는 것

그것은
가장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가장 하나님 닮는 것

사랑 그것은
너 하나로 차고 넘치는 것

매미 소리

시끄럽게 울어 쌓는

매미 소리 듣는가

그칠 줄 모른 저 굉음

가만히 서 있는 나무 위

꼼짝하기 싫다는 이파리들

더위에 그만 쉬고픈데

복장 터진 병뚜껑 터지는

그런 소리 듣는가

치근거리는 저 소리

어느 때쯤 멈추어 줄까

더위 먹은 바람마저

혀가 만발이나 빠진 대낮에

짜증 나는 저 소리

떼를 지어 소리 지르는 저 치열함,

그래

저러듯 울고 싶은 이유는

딴마음이 있어선가

너른 바다

큰 가슴은 떨어지는 폭포가 없다

옹색한 골짜기를 가르며

간드러진 산산山蒜 을 흔드는 일도 없다

흐르는 물은 산과 들을 지나

서러운 날 담아 바다에 보낸다

고요한 평화로 받아들이는

온유한 몸짓을 우리는 바다라 부른다

마음의 짐 내려놓고 가라

스스럼없이 받아 줄 것이다

테크로 놓인 갈맷길도 걸어 보자

손에 손잡고 동행할 것이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다

동백꽃 한 송이로 피어오르는 노을

그 붉은 심장에

풍진 세상 온전히 풀어놓고 가라

그리고 노래하라

낙심樂心이 그대의 것이다

길을 찾다

가로등 불빛 없는 낯선 땅

안개 자욱한 밤은 깊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
구부러진 산자락 끝을 모르는데
누가지금 새로운 세상으로 간다기에
가는 길 잃지 말라고
당부의 말 전해주었다
건너야할 다리는 얼마나 클지
강은 얼마나 깊을지
아무 걱정 두려움 말라고
그리운 사람들 만나는
다시는 이별 없는 기쁨의 길
오색불빛 휘황찬란한 그 집은
영광으로 가득도 하리라 일러준다
시들고 불타는 이 땅의 길은
어둠으로 찾을 수 없어도
저 멀리 캄캄한 바다 끝 불빛은
계명성처럼 환히 깜박일 것이네 

다도해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산들끼리 얼굴 마주치던
정다웠던 그대들
너울 파도 보자기에 싸여
그렇게 세월
억겁 달려 왔구나
 
*상전창해 되어
바다에 빠진 몸
물결 젖은 달빛
별빛 길어 비단을 짜고
갈기갈기 찢어내는
사나운 바람에도 멈추지 않았다

철썩철썩
비단 짜는 베틀 소리



*桑田滄海; 뽕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되다(동화작용)

*桑田碧海;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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