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후기

장산에서 (2월)---ㅇ

서문섭 2019. 6. 27. 10:50

어느듯 따스한 기운이 바짝 옆에 다가온 느낌이다

한두 번쯤 꽃샘추위가 남아 있겠지만

봄의 기미를 가만히 앉아서 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야말로 봄이 얼 만큼 왔나 궁금해지는 마음이다

나무들 가지에 발그레 물오르고

거무튀튀한 껍질 열리며 연둣빛 길이 시작되는 기적

해마다 봄이 불쑥 들어온 것을 보는 그 첫날을 위해

나는 몇 번이라도 길마중을 나갈 것이다

해운대에서 오르는 장산의 봄,

기미는 아직 미세하다

시치미를 떼는 듯 나무들은 여전히 퇴색한 겨울 빛으로 서있지만

몸을 구부려 자세히 바라다보면 여기저기 눈이 부풀어 오르고

봄 채비하는 기별들로 여간 분주하지 않음을 보게된다

낮에는 햇볕을 밤에는 달빛을 이마에 맞고 선 정중동의 산은

나도 모르는 사이 발치 산기슭에서 먼 곳까지 움 트려고 하는

크고 작은 나무와 숲들이 장난감처럼 줄줄이 줄을 서 있고

다닥다닥 발 한발 내디딜 틈 없이 꽉 짜여져 있음을 보게된다

봄 채비하려는 한가로운 풍경 속,

비 그친 질퍼덕거리는 흙을 밟아 산을 오르다가

청미래덩굴에 열어 있는 붉은 열매가 내 눈과 마주쳤다

봄 기미가 아니라 이는 때와 시절을 모르는 미련스러움의 겨울 잔상이

나의 눈을 고정시키며 발길을 붙들어 세우는 것이다

그 혹독한 엄동설한을 다 견디고

봄이 오는 길목까지 기다리고 서있는 순정의 마음일레라

청미래덩굴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든지 낮은 산자락에서

얼마큼 흔하게 볼 수 있는 덩굴이다

너무 흔해서 대수롭잖게 여기기 쉽지만

그 옛날 소싯적 농촌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추억이 아닐 수 없는 덩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래서인가 잎이나 열매가 우리네 손을 막 끌어당기는

정 많은 고향 사람 같아서 만나면 애틋하고 반갑다는 마음이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청미래덩굴을 망개나무라고 부르는데

전라도 지역에선 이를 맹감 나무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 나무는

좀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옛날 소 먹이러 가서 놀다가

배고파지면 이 열매를 따 먹은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청미래덩굴은 봄에 황록색 자잘한 꽃이 피고

가을에는 굵은 콩알만 한 열매가 맺힌다

연두색 열매는 점점 붉어지는데

한겨울 흰 눈을 쓰고 빨갛게 토끼 눈으로 내다보는 모습처럼

청미래 열매가 가장 아름다운 때다

겨울에 나무하러 간 남정네들도

그 붉은 마음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었던지

나뭇짐에는 빨간 열매가 달린 청미래 덩굴이 맨 위에 꽂히곤 했었다

열매가 연두색일 때 먹으면 신맛이 많고 먹을 만하지만

빨개졌을 때는 속살이 말라 퍼석하고 씨가 많아 맛이랄 게 없다

줄기에 가시가 달렸는데 잎은 원만한 사람의 심성처럼 넓고 둥글다

둥글둥글하고 반질거리며 만져보면 도탑다

산길을 걷다가 목이 마르면 잎을 둥글게 말아

옹달샘 물을 떠먹고는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잎이 가죽처럼 두꺼워서 물을 담으면 휘어지지도 않고

연둣빛 일렁이는 물맛이 더 싱그러웠다

그리고 잎을 싸서 떡을 찌면 서로 달라붙지 않고

잘 쉬지도 않으며 향기도 배여 독특한 맛을 낸다

긴 유리 상자에 망개떡을 넣어

장대로 어깨에 메고 팔러 다니던 망개떡 장수를

요즘도 부산 부평시장이나 자갈치시장 그리고 지하철에서도

이따금씩 간혹 볼 수 있다고 한다

청미래덩굴의 뿌리를 한방에서는 토복령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이를 산귀래라 하여 매독(성병) 치료제로도 쓴다고 한다

이런 이름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중국의 어떤 이가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다 매독에 걸려 죽어가게 되었는데

아내는 남편이 미워서 남편을 산에다 버렸다고 한다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마는

하여간 남편은 허기가 져 풀숲을 헤매다가

청미래 뿌리를 발견하고선 배고플 때마다 먹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산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해서

산귀래(山歸來)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청미래덩굴의 꼬장꼬장한 줄기 아래

양식과 약이 되고도 남을 만한 넉넉한 알뿌리도 있었나 놀랍다

아마 넓고 둥근 잎이나 가을 겨울을 지나

봄 길까지 따라오는 빨간 열매의 순정은

뿌리의 넉넉함에서 연유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숲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사는 흔한 덩굴이지만

청미래덩굴은 더 소중하게 대해야 할

귀중하고 귀한 덩굴(나무)이라 할 수 있겠다

 

2010년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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