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편-
지난겨울 숲길을 같이 걷던 한 시인에게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이야기를 들었다
시인은 오랜만에 만난 은사 시인님과
나무 밑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도토리가 툭 떨어지는 거야
그 소리
하,,, 말문이 닫히더라
두 사람 사이로 떨어진 도토리가 불러온 침묵
먼 곳에서 온 떨림이 얼핏 보이는가
들리는가 했다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 후원림 속에
큰 상수리나무들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행삼아 들렀지만 말다
가락국의 시조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묻힌
원형 토분이 있는 이곳은 김해 유적지의 상징적인 곳이다
김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소풍과 백일장 그리고
사생대회를 하며 이곳에서 뛰어놀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다
이 왕릉은 고려 때 까지는 능의 상태가 좋았는데
조선 초에 황폐화되어 선조 시절에 수로왕의 후손인 허엽이
현재 모습으로 정비하였다고 한다
후원의 숲에는 오래된 왕 버들과 상수리나무 모과나무와
다른 여러 나무들이 어우러져서 느긋느긋하게 산책하기에 참 좋다
금방 지은 쌀밥처럼 햇빛이 맑게 윤나는 가을날
나무들 사이를 걸으면 그냥 단순해지고 행복하다
나무의 덕(德)이다
후원림에 들어가
고목이 되어 허리가 휘어진 왕 버들이 먼저 보인다
꼬부랑 할머니 같은 왕 버들은 구부러진 몸
그 자체가 길고 긴 이야기다
힘겨운 왕 버들 속에 곧게 자란 줄기와 가지들로
균형 있게 뻗은 힘이 넘쳐나는 듯 한 상수리나무가 보인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의 일종이다
진짜 나무라는 뜻의 참나무는 먹을 것이 모자라던 시절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 한두 그루만 있어도
마을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어
구황救荒양식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게 한 고마움이 컸을까
상수리란 이름도 그렇게 생겨났다 한다
엄밀히 말하면 도토리나무도 따로다
그러나 보통 말하기를 참나무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를 일컬어
도토리나무라고 많이들 부르게 된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간 선조의 수라상에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도토리묵을 자주 올렸다 한다
선조는 환궁을 하여서도 도토리묵을 좋아하여
늘 수라상에 올랐다 하여 상수리라 했고
나중에 상수리가 된 것이라 한다
왕릉 후원림의 상수리나무에도 몇 가마니쯤
거뜬히 나올 것 같은 굵은 상수리 열매가 가득 달렸다
어떤 할아버지가 나무 아래 화구를 펴고
나무 풍경을 멋있게 그리고 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열매가 툭툭 떨어져 땅 위를 구른다
왕릉을 둘러보고 난 뒤 후원 숲을 걷던 사람들이
상수리를 줍느라고 땅바닥을 살피며 나무 옆을 돈다
엄마에게 칭얼대던 아이도 열매를 따라 뛰어 다니느라 즐겁다
도토리묵을 해 드시려는지
제법 불룩한 비닐봉지를 든 할머니는 표정이 진지하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참나무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가
구분이 확실하여 불렀는데
경상도 지역에서는 상수리나무라는 이름이 좀 낯설다
꿀밤나무라고 불러야 오히려 알아듣는다
어렸을 때 뒷산에 있던 상수리나무 아래서
상수리 열매를 줍기도 했었지
떨어진 지 오래된 것은 색이 바랬는데
막 떨어진 굵다란 상수리는 새로 산 구슬처럼 반짝반짝 윤이 났다
장난감이 따로 없던 시절의 아이들은
이 상수리를 주머니에 모았다가 공기놀이도 하고
팽이놀이도 하고 놀다가 혼자 있을 때는
반질반질한 상수리를 어루만지기도 했었다
보통의 나무들은 단풍이 들고 나면
곧 낙엽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나목으로 겨울을 지낸다
그러나 상수리나무를 비롯한 참나무와 도토리나무들은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올 때까지
제 몸의 마른 잎을 남겨놓고 달고 서있다
겨울 찬바람에 바짝 마른 잎들이 해소든 노인의 목청처럼
가르랑거리는 것을 보며 애착과 미련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려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상수리나무들은 산 위에서 들을 내내 바라보고 섰다가
들판에 풍년이 들면 열매를 조금 맺고
흉년이 들면 열매를 많이 맺어
배고픈 사람들과 산짐승, 벌레들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상수리나무라는 이름이 그래서 더 정답게 느껴진다
수로왕릉 주변에는 박물관과 대성동 고분, 봉황대 유적지 등
가야왕국의 자취를 느끼며 걸을 수 있는 유적지들이 모여있다
수로왕비릉과 *구지봉도 둘러보며
그 옛날 가야사람들이 왕을 맞기 위해 춤추며 불렀던
구지가를 떠올려보면
정취가 듬뿍한 가을산책길로 무척이나 좋을 것이다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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