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후기

지리산 둘레 길에서 3월

서문섭 2019. 12. 6. 23:12

전북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와 주천면 장안리를 잇는

지리산 둘레길 14.7㎞를 걷는다

운봉고원의 너른 들을 가르는 제방길과

구룡치라는 고개 사이로 여러 시골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장정들의 걸음으로 4시간 정도 걸린다는데

충분히 여흥을 즐기며 걷노라면 넉넉잡고 5시간 정도 걸린단다
오전 10시에 운봉에서 출발을 한다

첫 걸음은 언제나 막연하다

그러나 시작이 반 이라는 말이 있질 않는가

갈림길마다 코스를 알리는 표시목이 세워져 있어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을것 같다

운봉에서 주천으로 가는 길이라면 검은색 화살표를 밟고

반대 방향이라면 붉은색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걷는 내내 지리산을 쳐다보며 밑길을 통행하게 된다
그렇게 친절한 표시목만 믿으며 게으름을 부리는 사이

일행들로부터 뒤처졌다

어차피 중간중간 길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있다

둘레길이란 느리게 에둘러가는 길이기에

일부러 서두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이 든다

간밤에 비가 조금 내렸는지 흙길이 촉촉히 젖었다

그 길 위로 햇빛이 내리니 금빛으로 반짝이는데

마치 황금길을 걷는 기분이다

행정마을에 다달았다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선정된 서어나무숲이 있다

영화 춘향전의 촬영지로 아주 뜻깊은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 키보다 몇 배 높은 나무에 그네가 걸렸다
한 무리는 벌써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식사를 한다

서어나무숲 옆 식당에선 파전 굽는 냄새가 요란하다

식당이 보일 때 먹어야지 지금 안 먹으면 언제 또 먹겠소?

나름대로 맞다는 논리를 갖다댄다

그러나 가는 길 내내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널렸다

곳곳에 식당들이 둘레길을 걷는 여행자들을 기다린다

 들녘엔 꽃을 시샘하는 기운이 돈다

그러나 그 기운을 뚫고 완연한 봄이 피어나고 있었다

연초록 새순들이 땅 위로 삐쭉거리며 고개를 세운다
노치마을에서 점심을 먹기위해 발걸음을 멈춘다

노치마을은 한반도의 등뼈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지점이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만큼 마을의 지대도 높다

그냥 들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높이가 해발 550m나 된단다

웬만한 산 정상의 높이다

구멍가게에 들어가 라면을 주문한다

부뚜막에 올라서 오침을 즐기던 고양이가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을 잠시 흘겨보더니

다시 제 할 일을 하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는다

어지간한 여행자들이 다녀간 듯 놀라는 눈치도 아니다

라면상이 나오자 고춧가루 범벅의 김치가 먹음직스럽다

뱃속을 챙기고 잠시 평상에 드러눕는다

하늘 참 더럽게 맑다

하늘을 나는 새 한마리가 눈 위를 스치며

지자지보지자지보 하며 갈길을 재촉한다

노치샘에서 샘물 한 바가지를 퍼마시고 정신을 차린 후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그냥 걷는 것만은 아니다

빈 억새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를 좀 하고

졸졸거리는 시냇물에 떠있는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어린시절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운봉~주천 구간의 유일한 난코스 구룡치로 접어든다
나이 지긋한 이곳 사람들은 이곳을 똥고개라 불렀다

이 재를 넘으면 또 재가 나오는데

힘들어서 그냥 똥을 싸버린다고 해서 똥고개라 한단다

구룡치를 넘는 것만 치면 운봉 쪽에서 넘는 편이 수월하다

운봉의 지대가 주천보다 높기 때문에

그만큼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많다고 한다
구룡치를 넘는 중간에 특이한 이름의 표시목이 눈에 띈다

""사무락다무락""

왠지 새색시의 수줍음처럼 예쁜 이름이다

일행의 설명에 따르면,,,

사망事望(사무락)=어떤 일을 행할 때 바래보는 마음 

다무락=전라도 사투리로 담벼락을 이르는 말

즉, 험한 이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무사하게 넘을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라며 돌을 쌓는단다

쌓아올린 돌탑들이 군데군데 들어서있다

필자는 돌을 얹지지도 않았고 빌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무사히 고개를 넘어 주천에 도착했다

그렇게 게으름을 피워 걸었는데도 

오후 3시다발바닥이 얼얼한 것이 묘하게 기분이 좋다

겨드랑이를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이따금씩 불어도 

봄은 봄이다봄바람이 지리산을 타고 그렇게 온다

 

2010년 3월 18일지리산 밑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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