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사람의 친구가 되어
나무가 들어준 낱낱의 슬픔은 얼마나 많을까
나무에 달린 잎들은 그래서 셀 수 없도록 많이 돋아나는 걸까
사람 몸이 숨 쉬는 공기를 위해서도 나무는 소중하지만
금이 가고 상한 우리 마음을 말없이 보듬어 주기에
나무는 고마운 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처음 가보았을 때는
나무의 잎이 진 초겨울쯤 이었다
마른 가지에서 콩꼬투리가 바람에 서걱거리고 있어
자귀나무인 줄 금새 알아보았다
고분군 아래 만들어진 산책길을 따라
유난히 자귀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꽃이 필 때는 환한 모습을 보고 싶어해 진다
하지만, 생각은 그때 뿐
도회지 삶이란
습관처럼 늘 지나는 길만 오가며 하루를 여닫기 바빠
그 후로는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올해야 생각이 나서
자귀 꽃 피는 유월과 만개의 칠월을 기다려 찾아오게 됐다
자귀나무는 분홍빛 술이
공작새 꼬리처럼 화려하게 펴지는 꽃이 아름다워서
공원이나 정원 잔디밭 속에 많이 심어져 있는 걸 보게 된다
고향이 시골인 사람들에게는
어릴 적 낮은 산자락 양지 틈에서 쉽게 보던 나무였다
소꼴을 먹이러 산에 가다보면
소가 길 옆 자귀나무 잎을 얼마나 맛있게 뜯어먹어선지
우리는 자귀나무를 소 쌀밥 나무라고 불렀다
보리밥이나 겨우 먹던 시절에 소 쌀밥이라 했으니
소가 얼마나 반기며 달게 뜯어 먹었는지 알 수 있다
복천동 고분군을 따라 걸으니
군데군데 자귀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대략 샘을 해보니 30여 그루도 넘어 보인다
키도 과히 크지 않고 가지가 옆으로 벌어져
긴 치맛자락처럼 아래로 펼쳐져 있다
부채춤을 추는 무용수들의 고운 손끝에서 펴지는
꽃술부채처럼 화사하게 생겼지만
옆으로 바라진 나무 생김새를 보면 소박한 느낌이다
더운 여름날 일하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점심을 머리 위 광주리에 가득 이고
환하게 걸어오는 촌 아낙네를 연상시킨다
풀밭에 신발을 벗어놓고
나도 아이들처럼 올라가 나무 위에 앉아본다
바람도 나뭇잎도 살을 가까이 대며 닿는다
잎이 서로 마주보고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은
꽃이 피지 않을 때도 자귀나무는 아름답다
쌍을 맞춘 잎은 낮 동안 옆으로 펼쳐졌다가
밤이 되면 오므려 겹쳐져 사이좋은 부부처럼 잠을 잔단다
그래서 합환수(合歡樹)라 부르기도 하고
부부금슬을 위해 집안 마당에 심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모두들 아파트에 많이 살게되니
자귀 꽃이 피는 이즈음 부부가 손 한 번 잡고
자귀 꽃 피어있는 이 길을 천천히 걸어도 좋을 듯 싶다
복천동 고분군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부산 지역에서 꽃피웠던 가야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철로 된 무기와 갑옷 등 유물이 많이 나와
그때의 역동적인 정치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일찍부터 신라화 됐음을 반영하는
신라 토기 등의 유물도 나온 곳이다
그리고 이곳 복천동은 얼마 전까지 판자촌이 밀집해 있어서
다행히 도굴이 안돼서
유물과 무덤형태의 보존상태가 좋았다고 한다
여름 땡볕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고분의 넓은 잔디 위로
까치들이 날아와 한가롭게 노닌다
까치가 노는 높은 곳까지 올라가보니 고분군을 빙 둘러
언덕배기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집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루는
또 그렇게 촘촘히
알뜰한 고개를 넘고 있다
어떤 아름다움도
절박한 생의 고통을 거치지 않고
꽃피는 일은 없겠다
뜨거운 여름날에 환하게 피는 자귀나무 꽃을
그래서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자귀나무-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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