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랑 140

나의 태양 --ㅇ

한밤중 창밖은 어둠의 휘장에 덮여 비밀스러운 신경조직으로 밀어를 나눈다 전설처럼 깜빡이는 저 멀리 알 수 없는 작은 불빛들은 가슴 조이며 누군가를 찾고 맹인의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더듬는데 풀 수 없는 암호들이 달라붙어 내게 씨름을 걸어온다 어디선가 조금씩 새어든 빛줄기로 어디쯤인지 나의 좌표만 짐작할 뿐 몸은 무겁고 지쳐 더듬거릴 때 오 느닷없이 다가와 하늘이 열리는 당신의 시간 밝은 아침을 듬뿍 안겨주는 이제야 끝나가는 나의 ‘어둠의 책’ 읽기

한사랑 2023.01.13

시간 죽이기

나의 해와 달이 만든 시간 속에 툭! 하고 뛰어든 것은 꽃이 피는 봄이었다 나의 봄은 나도 모르게 꽃이지고 시간은 나를 불러 노예처럼 부렸다 지친 나는 시간을 밀어내고 죽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버리고 죽인 시간들이 살아서 날 찿아와 왜 날 버렸느냐며 학대하고 나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있는 시간들에게 말했다 ‘머지않아 해지고 밤이오면 빛났던 날들이 나를 부르겠지만 시간만 잡아먹는 질병과 허무한 일들이 떠나기 전에 감사로 살겠노라고, 감사와 열정은 한 몸이니 비로소 나는 시간을 먹지 않고 살리라고

한사랑 2023.01.13

숲속에서

바람꽃 아래 누운 바다처럼 나는 은하에서 내린 이슬과 푸른 향기에 젖어 사르르 눈을 감는다 뼛속까지 푸름이 스며들면 어릴 적 어머니 마음에 젖고 어디선가 밀려오는 옛이야기들이 가지에서 작은 몸짓으로 흔들리고 있다 귓가에 스치는 너의 목소리는 풀숲의 날갯짓으로 날 부르고 산지기인 양 멀리서 지켜보는 쫑긋 세운 노루의 귀와 눈빛 그윽할 때 나는 조금씩 흙 바위가 되어 이름 모를 나무와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산울 병풍 사이로 열린 끝에서 나는 하늘이 된다

한사랑 2023.01.13

눈물의 기도---o

눈물샘 터져 소리 없는 눈물이 흐릅니다 그대 이름 부르고 만지며 웁니다 시간은 바람 소리처럼 지나가는데 대답은 기약이 없고 캄캄한 어둠으로 가는 그대 영혼 위해 망치소리 들리는 듯한데 귀를 막고 외면을 하니 보이지 않는 진실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들리지 않는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가슴 미어지는 아픔으로 하늘 향해 손을 드는데 내 팔은 바람에 흔들리고 밤을 지켜 서는 추수 밭에 새 쫓는 허수아비 언제 멈출까요 먹먹한 가슴에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부르짖던 심령으로 업드려 웁니다

한사랑 2023.01.13

소리

나는 다 기억하지 못하네 내 울음소리 노랫소리 당신이 지어주신 소리는 숲속에 새들보다 아름답지 못하고 웃음은 들꽃보다 못하여도, 보이지 않은 짐승이 내 속에 살아 산천을 흔드는 맹수의 울부짖음이 새어 나오고 태풍의 바람 소리는 가슴을 찢는데 비록 고운 명기로 태어나지 못해 떨고 있는 문풍지 같을지라도 한평생 감사로 살려하네 웃음 주고 생명의 기운 주는 영혼의 소리 드리려 하네

한사랑 2023.01.13

세모歲暮에 서서---ㅇ

아쉬운 것은 더 아쉽고 그리운 것은 더 그리워져라 아픔의 언덕은 높게 솟아오르고 슬픔은 유황불 계곡까지 깊어져 마침내 진실의 샘물 솟아나라 사랑은 피같이 붉어지고 보이지 아니한 것들은 꽃으로 피어나 헤아릴 수 없는 끝은 수평선 위에 아침처럼 밝아오라 시간의 벽 사이에도 진리의 빛은 반짝이나니 한 줄기 떨구는 눈물마저 존귀한 진주가 되는 마지막 잎새 같은 숨결 앞에 서라 지금은 또 다른 꽃을 피우기 위해 어림의 *편린片鱗을 벗고 산산이 부서진 꿈의 무덤 위에 섰나니 다시 떠오르는 저 소망의 빛살로 이 작은 핏줄 구비구비 휘돌아 한 백 년 잠든 영혼을 깨우게 하라 *작은 부분이지만 원래는 큰 것의 비늘

한사랑 2023.01.13

구속의 은혜---ㅇ

죽은 자를 산 자 같이 씻김굿으로 혼백을 달래던 시절 죄와 허물 강물처럼 흐를 때 강기슭 진흙에 갈대처럼 피어난 나를 그가 찿아와 보혈로 내 영혼 씻어 주었네 아! 이제는 순간마다 보좌를 보는 영광이여 한 번 맺은 언약은 불변하여 영원에 이르고 언제나 넉넉한 그의 가슴은 호수 같아 내 마음 구름 위에 떠 있는 은혜의 바다일세 때때로 일렁이는 근심과 눈물의 물결도 고통의 비바람으로 문지르고 질병의 아픔으로 닦아내는 사랑은 깊어 더러움도 치욕도 아득한 마음의 얼룩일 뿐 이 길 함께 가는 이들이여 슬퍼 말아라 아파하지 마라 환난에서 구별되고 쪼개어 거룩게 하였으니 빛나거라 아름다운 그릇으로 진귀한 보석으로 그의 곁에 두시려 하네 삶의 시련은 내 영혼에서 세상을 씻는 향기로운 비누였네

한사랑 2023.01.12

산에 오르다---ㅇ

산기슭 서성이는 구름 내려다보고 어디로 가느냐 물어도 말이 없네 윗 세상 한 가슴 품으려 올라 왔는데 산이 나를 바위에 눕히고 큰 산 짊어지겠다는 호기를 벗길 때 이제야 철난 듯 푸름 가득 하늘을 마셨네 품을 수 없는 것이 그대뿐이든가 발아래 밟아 두었다고 내 것이던가 그리운 얼굴들이 세월의 모퉁이 돌아가네 산 등에서 만난 어릴 적 무등 태워 주던 아버지 우거진 숲 아늑한 골짜기에서 끝없는 사랑으로 다가온 어머니 험한 길에서 주저 없이 손잡아주던 친구여 보고 싶은 이름 하나 태우지 못한 부실한 등 인자한 그대마저 품지 못한 비좁은 가슴 누굴 위해 내밀 수 없는 연약한 손이 시간을 스쳐 간 몸짓 추스린다

한사랑 2023.01.12

부재

눈 없는 자 보고 내게 눈 있음을 알았네 손발 없는 자 보고 내게 손발 있음을 알았네 젊은이들 옆에서 나이 들었음을 알았고 사경의 동굴을 지나며 건강의 소중함을 알았고 폭풍우 앞에서 일상 평안의 행복을 알았네 하루의 작은 습관이 운명을 바꾸는 열쇠라는 것도 해 떠난 자리에는 어둠이 오고 달도 별도 바람까지도 불어오는데 그대 떠난 자리에는 그 무엇도 체워지지 않는 영영 텅 빈 자리 그리움이 젖어있네

한사랑 2023.01.12

브니엘의 아침---o

칠흑의 어둠을 뚫고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생사의 씨름에 불구가 된 육신으로 본태의 마음을 씻는 나에게 잠 못 이룬 강물은 그제야 덮인 안개 젖히고 일어나 눈부신 새 아침을 노래하고 걱정 근심사라진 하늘을 보았네 지난밤 숲속 전쟁에서 사람이 천사에게 이겼다는 소식을 새들은 나뭇가지에 앉아 퍼뜨리고 고난이 은혜가 되고 두려움은 확신으로 평강의 강물 되었네 오 나의 주 브니엘로 찿아와 밤과 낮을 다스리네

한사랑 2023.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