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하늘에서 보내온 편지) 79

사랑

이 목숨 다 바쳐서사랑해도 좋을 이 있다면목숨의 뿌리 다 시들 때까지온몸과 마음으로사랑하고 싶소밀려오는 파도처럼멀리 떠나가야만 하는 세상후회 없이 미련 없이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처럼사랑해도 좋을 이 있다면 좋겠소언젠가 세월의 연줄도 풀리고 말아젊음이 녹슬어 가기 전에가슴 저미도록 그립고사무치게 생각나는 사람그런 사람 있다면 모든 걸 송두리째 불태우고 싶소흘러만 가는 세월이 아쉽고덧없이 의미 없이한 목숨 다 바쳐사랑해도 좋을 이 있다면그를 위해 모든 버리고사랑하며 살고만 싶소

팔영산에서

아침이 밝은 진산 마음에 정한 팔영산을 오른다 추위를 간직한 채 봄 기다리려는 설레임 약간은 슬프게 하려는 뭔가가 있을 법 한 겨울 산 알싸한 찬바람 고즈넉함의 기운이 감도는 곳 잔설 남아있는 능가사 일주문을 조용조용 발걸음을 옮긴다 해탈에까지 이르지 못 하드래도 미련을 벗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볍다 우뚝 솟은 정상 장벽에 에두른 산 파도소리가 고운 너른 바다 마치 땅덩어리로부터 부풀려 내는 듯 고무풍선 모양의 땅이 시야에 닿는다 바람이 연주하는 풀피리 소리 울리고 내리꽂히는 벼랑들이 시원시원 뻗어있다 바다와 맞닿은 해안선 거센 바닷바람에 몸 맡겨 부서진 포말들 힘찬 내 딛음을 예고하며 연방 봄내음을 쏟아낼 태세다 뻗어있는 첩첩한 산릉도 가슴 들뜨게 하긴 마찬가지다 천둥산 마복산 비봉산 크고..

은사님께

추억에 깃든 학창 시절베풀어 주신 사랑의 기억식을 줄을 모르는 열정으로 남아 장래가 너무나 밝았습니다새싹들이학문을 트게 되였고꿈들이 여물게 되었으니함께 하셨던 시간들은언제나 사랑의 천국이었습니다글 애 벗들을언제나 돌보시고기르치시는 은혜가 넘쳐나서하늘에 태양보다 더 눈 부십니다여정 따라보랏빛 꿈 키워 주신 만큼기쁨이 되고열매를 맺게 하시였으니은사님의 사랑가히 하늘과 같습니다.

공동묘지

결실 이룬 공동묘지에세찬 바람이 일든 말든폭우가 내리든 말든잘났는지 못났는지따져야 할 이유가 없다담장 너머에 핀 장미 아름답다는 핑계만으로가로화단을 짓밟을손도 없고 발도 없다새는 시절 따라 울고꽃은 모양 따라 만발하여밤에도 환한 숲속처럼정금이 까맣게 익어칡살 굵어 먹을 것이 많다아침 저녁하늘이 철문처럼 열리고 닫혀도서두르거나 두드리는 일 없어죽은 자들이 산 되고 물이 된다내 가정 챙기기보다남의 이름 더 알리려 했으니살아보겠다고 허둥대던 날들상식이 되었는지 모른다만이제 와 아무런 소용 없을지라도그런 삶에 귀 대고슬쩍 한번 귀뜀을 해 본다잘난이나 못난이나치열한 욕심을 미련 없이 버려도그나마 이 몸이 죽어저렇게 유효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인가

동백꽃

비수에 꺾인 목 낭자한 선혈 치렁한 잎 새 사이로 달랑달랑 위태로웁다 주저앉은 동백섬에 벌어지고 피고를 거듭하니 앞 다투는 봄을 연다 무채색 겨울을 점령한 온기 야금야금 예쁜 자태로 반기어든다 피면 아름다워 보기에 좋고 지면 봄을 부르기에 슬프지 않다 떨어지는 꽃 서럽다 아니할까 만 봄 기다리는 마음 땜에 그 서러움마저 반가운 게 아닌가 미끈미끈한 수피 꾸불꾸불한 수형 멋을 짜깁기 하여서 겨울의 백미이다 봄이 서러워 통째로 낙화한 꽃 한 몽우리 쥐어들고 누군가의 동백아가씨 노래를 힘차게 불러본다

천렵 川獵

녹음이 푸르러서 인 지 시냇물도 시원했다진달래는 먹지 못했을망정가벼운 물장구는 칠 수 있겠네천렵 위해 어린 시절인 양철없이 서두른다 비릿한 시냇물이햇빛에 희번덕거린다물 반 고기 반살아있는 것들이라서인지호락호락지를 않는다낯선 재미가 쏠쏠하다 순한 방식의 재래식 천렵자잘한 것은 그냥 놔줘,훗날을 기약하며 말야,시원하게 혹은 조용하게흘러가는 물의 이곳저곳에서맨발에 밟히는 자갈의 낯선 감촉은물장구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손이 닿지 않는 등짝의 때시원하게 밀어내는 듯천렵에 내가 낚여 버린다

꽃내음

은밀한 꽃내음 묻혀오는 바람소리귀 도사려 들어 본 적이 있는가바삭이는 갈잎 흔들며 지나온 바람소리솔가지 어린잎 사이를 지나는 바람소리이런 바람의 내음 받아본 적 있는가 폭설처럼 피어져 내려온 꽃들이바람의 노래 타고 어떻게 춤 추는지당신에게 한번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바람으로 일렁이는 춤사위꼭 한번만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빛으로 바람으로고산화원의 풍광風光은 그렇게 피어난다아주 이른 봄 박새 꽃이 새순 돋울 때는삶의 힘 얻을 만큼 강한 느낌을 받는다 한여름 어른의 키만큼이나 커지면서원추꽃차례 이루어 상아색의 꽃고산화원 전체를 덮어버릴여름이란다

해바라기

짙어지는 여름이다만 지리한 장마는 꼬랑지가 길다 더우면 덥다 투정을 하여간사한 게 사람 마음이래도햇빛 그리울 따름이여서잔뜩 찌푸린 하늘 우러러해바라기가 되어본다 더 애타게 해를 바라볼 놈들그 놈들이 바로 해바라기일 게다놈들 옆에 서면조금이라도 더 쨍쨍한 볕 쬘 수 있을까기대도 된다 그 볕 아래 서 있으면밥벌이 지겨움에 힘겨운 삶도잘 마른 빨래처럼그렇게 풋풋하도록 마르지는 않을까

겨울 단상

삭풍에게 겁탈을 당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아직은 살갗이 트는 아픈바람인데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겨울은 그냥 돌아서 지난다 젖고 간 뒤 산정 오르는 구름에도 고개 끄덕끄덕 흔드는 잎새 어디에도 깃들지 못한 푸르른 생명 허리 굽혔던 풀들이 다시 일어선다 휑한기운이 옷깃을 스친다 모든 것 조용히 봄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