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 5집 73

팔영산에서 5

여덟이나 되는 봉우리에 바위 꽃인지 이끼꽃인지 바람에 살부비며 아롱 아롱 피었다 봄볕 게릴라처럼 숨어든 편백이 울울창창 얼음 녹아흐르는 눈석임 소리 어릿어릿한 길 자분자분 걸으며 꽃봉오리 지우듯 지나간다 팔영의 기이한 산 준령이 하늘 강 건너는 징검다리로 보이다가 이따금 얼핏 연꽃숭어리로도 보이니라 신비한 이방인의 눈처럼 해창만의 푸른 눈빛과 마주치며 먼 산 단숨에 달려오는 선녀봉 유영봉 살짝 지나서 귀에 익은 옛 관악기 생황 소리 접한다 어느 신선이 내려와 입맞춤 했을까 파르르 떨리거나 걲어지며 열일곱 대통 속 흐르는 생생한 울음 그 소리에 내가 어이 애잔한 마음이 없을소냐

2020 제 5집 2021.01.17

후쿠오카에서 5

​ 푸른 물결 노래하던 바다 파도치는 붉은 피 헤치고 작은 신神 바다를 건너간다 자유 흐르던 바닷물에 통곡의 영혼들 물안개로 피고 휘저어 피맺힌 숨결 사이로 수천수만이 강을 건너가듯 이내 몸 하늘에 몸을 싣는다 ​ 심장 노리는 총소리에 물새들 모두 떠나가고 날치 밭에 백구白鷗 우는소리만 잊어버린 파도 이랑 슭 아직도 울고 운다 오늘도 ​ 지구를 돌리는 태양이 새 신랑처럼 떠오른 어둠의 편 물굽이마다 일어나 춤추고 노래하는 날 별빛 숨는 캄캄한 밤이래도 神이 죽어 아침을 만들 것이다 ​ 그날 오기 전 후쿠오카여 부르거라 높이 솟아나라 나와 동행하신 신을 보거라

2020 제 5집 2021.01.17

해창만에서 5

아니, 아무도 몰래 사랑한 번 나누고 싶다 골패여 주름진 늙은이라도지만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여덟 봉 땅거미 내린 팔영산에서 누렇게 달빛내린 훤한 초저녁 길을 그녀와 함께 그녀와 함께 다시 한 번 거닐고 싶다 그래, 그 옛처럼 사랑한 번 해보고 싶다 그녀와 단둘이서 걸었던 길을 다시 한 번 거닐고 싶다 갈바람 흔들어 주는 해창만에서 하얗게 햇빛내린 밝게 비친 한 나잘 길을 그녀와 함께 그녀와 함께 다시 한 번 거닐고 싶다 땅거미 내리는 팔영산 에돌아 갈바람 흔드는 해창만에서 그녀와 함께 그녀와 함께 사랑 한번 해보고 싶다 그녀와 함께 그녀와 함께 사랑 한번 해보고 싶다

2020 제 5집 2021.01.17

해몰(海沒) 5

노을 젖은 수평선 남겨진 것 하고는 아직 뜨거운 사랑 그리고 정 금빛 휘황찬란한 세월 위로 파리하게 스러져가는 안타까운 시간 몇 번을 반복하면서 너는 또 다시 살아나는가 너처럼 살겠다는 욕심이 울컥 얼마나 간절함이 있어야할까 얼마나 사정해야 그 꿈 이룰까 문신처럼 일그러진 생채기 남겨진 것 뒤란 되어 가만가만이 사위어가는 잊혀서 지난 사연들 저것이 뒹굴며 죽음을 부르는가

2020 제 5집 2021.01.17

배롱나무

배불뚝이 장독대 넘어가면 배롱꽃나무 고운 천 같은 차라리 환희의 표상이면 어떤까 퍼즐조각 붉은 볏처럼 보여 선연한 등명燈明이 걸리고 허운데기 풀어 매듯 약속한 사랑 빗질에 하염없이 하늘 하늘거려 기다리던 씨방에 정을 그리는 가을바람에 속삭이는 불꽃 생생한 신음소리 밤을 태우는 사랑 담장마다 밤중처럼 찾아와 스스로 피고 지는 소리 제 사랑에 지쳐 지쳐 풋 계집이 간지럼을 탄다

2020 제 5집 2021.01.17

보성 녹차밭에서 5

서편제판소리 한 대목 어허이 폭포수 득음정지나 산 나이테 두른 차밭 골 오르면 차 꽃 튀밥처럼 터지는 지절 이슬 같은 애기사과가 대롱대롱 초가을 색 품으며 익어가고 척박한 차밭 일구다 청산에 묻힌 두 봉 어르신의 고단했던 삶을 생각한다 호위무사 삼나무 편백나무 좌우 빽빽하게 들어서 잇고 숲길아래 물봉선화 촌색시 수줍은 치맛자락처럼 연분홍빛이 봄소식 같다 시詩동행이 된 시인들과 녹차아이스크림을 나누고 나도 가고 너도 가야 할 연애사 이별노래 부르며 녹차축제 난장 터 지나는데 현란한 가위춤 엿장수 가위질 막춤이 즐겁고 누더기 각설이에 음담패설 익살 좋은 넉두리춤은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앉힌다 돌아오던 길 다관에 차를 우리며 쪽진 머리 달빛차 따라주는 여인의 가을 향기가 황차의 남도 노을빛으로 은은하다

2020 제 5집 2021.01.17

제주도에서 5

어느 날 신神의 정원에 갔었네 창조주 솜씨에 천사들 비명 지르고 보잘 것 없는 생명들이 거듭나 신비의 삶을 살고 있었네 말라비틀어진 나무 일어나 노래하고 너무 늙어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감귤나무들이 주렁주렁 열매 달고 버림받은 돌들 보석 되어 빛나고 있네 화산의 불구덩이와 폭풍우 땅에서 만들어진 그들은 나무와 돌 태양과 바람 풍랑과 시간으로 작품을 만들고 계시는 야훼 우리는 神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네 온 세상은 신神의 정원 모난 것 깎이고 긴 것 잘라내어 바람 불면 나 일어나 노래하리 방긋 웃는 해를 향해 춤을 추리 거기 일하시는 하느님 정원에서 ​

2020 제 5집 2021.01.17